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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관리와 M&A…대한통운에 어떤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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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 2015. 3. 1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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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락인인터넷종합편성방송‘팩트TV’보도부장

 

국내의 대표 종합물류업체인 CJ대한통운은 올해 창립 85년째를 맞았다. 일제강점기인 지난 1930년 조선미곡창고(주)로 설립돼 지금에 이르니 산전수전을 다 겪은 셈이다. 대한통운의 역사가 곧 대한민국 물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오랜세월만큼이나 지금의 CJ대한통운이 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먼저 파란의 세월을 되돌아보면 1963년에 상호를 ‘대한통운’으로 변경하고, 1968년 7월 국영기업에서 민간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때까지 무려 5번의 상호가 바뀌었다. 그만큼 부침이 심했다는 뜻이다. 그 뒤에도 대한통운 은 바람 잘날 날이 없었다.


필자는 지난 1999년 1월부터 약 5년 정도 물류전문지 기자로 활동했다. ‘대한통운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 정도로 대한통운 내부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던 시절이다. 필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재임했던 김여환, 곽영욱, 이국동 사장과는 언제든지 독대가 가능했다. 이들 세 명의 전임 사장들과도 말 못할 일화가 많은데, 이것은 다음 기회에 풀어놓기로 한다.


동아건설 지급보증으로 흑자 부도 후 법정관리이번 주제는 대한통운 역사상 최대 격변기였던 2000년대 초반 약 10년간의 이야기다. 지난 1997년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수많은 기업들이 쓰러져갔다. 대한통운의 모그룹인 동아그룹도 예외가 아니었다. 같은 해 5월 동아건설은 자회사인 동아엔지니어링의 부도를 시작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회사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경영권을 포기했다. 그 자리에는 김영삼 정부시절 건설부장관을 지낸 고병우씨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채권단의 채무조정에도 불구하고 동아건설의 경영실적이 개선되지 않았다. 더 이상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아래 퇴출이 임박했다. 당시 재계순위 14위였던 동아그룹은 핵심 건설사인 동아건설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무너져 내렸다. 2000년 11월 초 대한통운 본사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워크아웃 기업 중에 회생이 불가능한 곳은 퇴출시키기로 했는데, 그곳에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이 들어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한통운은 동아건설에 지급보증을 섰고,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 컨소시엄으로 참여했지만, 공사가 지연되면서 부채 8300억 원을 떠안고 있었다. 곧 발표될 부실기업 퇴출명단에 대한통운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당시 대한통운의 경영실적은 동아건설과는 사뭇 달랐다. 매출은 증가했고, 순이익도 덩달아 늘어났다. 자산이 늘면서 부채는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건설과의 동반퇴출은 누가 봐도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대한통운 사내 비공개 게시판에도 울분과 함께 동아건설과 동반퇴출을 성토하는 글들이 쇄도했다. 자칫 회사가 공중 분해될 순간이었던 것이다. 대한통운 경영진과 노조는 대책을 논의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어느 날 인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서정욱 전무가 필자에게 잠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필자는 물류기자들의 협의체인 한국물류기자협의회를 사실상 이끌고 있던 터였다. 서 전무는“기자회견을 열 계획인데, 정 기자가 좀 적극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평소 알고 지내던 일간지 기자와 전문지 기자들에게 기자회견에 나와 달라고 연락했다.


대한통운이 공중 분해되면 물류산업은 크게 후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뻔했다. 기자들도 동의했고, 속속 기자회견장으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전문지 기자들의 역할이 참 중요하다. 전문지는 업계를 잘 아는 만큼 전문성 있는 기사를 써야 한다. 또 업계의 폐부를 날카롭게 지적해서 곪은 것은 터트리고, 썩은 것은 과감하게 도려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업계가 어려울 때는 누구보다 살신성인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대한통운이 퇴출 위기에 놓였을 때도 그랬다. 만약 이런 소명을 충실히 하지 않는 전문매체가 있다면“업계에 빌붙어 기생한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기자회견은 서울역 맞은편에 있던 전국항운노련 회의실에서 열렸다. 대한통운 임원과 항운노련 간부들이 서있는 가운데, 항운노련 위원장이 성명서를 읽고 일문일답에 들어갔다. 대한통운은 동아건설과 동반퇴출 억울함을, 항운노련은 대한통운이 부도나면 물류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날 일간지에는 대한통운 기자회견이 대서특필 됐다.


대한통운은 당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물자 등 대북물자수송과 정부 정책물자 수송을 거의 전담하고 있어서 대한통운의 퇴출은 남북경협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여론의 힘과 노력이 통한 것일까. 대한통운은 극적으로 구제됐다. 서울지법 파산부는 회사정리절차를 신청한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에 대해 2000년 11월24일부터 법정관리 개시결정을 내렸다. 당시 파산부 재판장이 현 양승태 대법원장이다. 회사는 부도 처리됐지만 퇴출은 피함으로써 회생 가능성이 남았다.


대한통운 임직원은 말 그대로 지옥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법원은 공동관리인으로 장하림 전 서울은행 상무와 곽영욱 사장을 선임했다. 당시 동아건설 채권은행단의 주간사가 서울은행이었다. 장 관리인의 선임 배경에는 서울은행과의 관계가 작용했던 것이다. 회사가 부도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주식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대한통운 여직원들은 회사주식을 결혼 밑천으로 갖고 있었던 사람이 많았다. 대한통운이 워낙 우량회사였기 때문에 주식을 사면 떨어질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곽영욱 사장이 취임한 후 대한통운 임직원들의 우리사주 비율은 엄청 높아졌다. 대한통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갈 당시 대한통운의 주식분포를 보면 우리사주 13%, 동아건설 채권단 5.3%, 기타 일반투자자 81.7%이며, 대부분 소액주주로 분산돼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었다. 그러니까 소액주주를 빼면 우리사주를 갖고 있는 대한통운 임직원들이 사실상 최대 주주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력으로 경영권 확보가 가능한 상태였다. 대한통운 경영진은 이것을 노렸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부도나면서 주식은 감자됐고, 결혼자금까지 주식 사는데 쏟아 부었던 여직원들은 허탈해했다. 목돈 마련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구조조정도 뒤따랐다. 당시 대한통운의 직원은 6000여명이었으나 당장 정리해고는 하지 않았다. 신입사원을 채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자연감원을 선택했다. 대신 임원은 40%를 감축하고, 보수도 25%를 감액했다. 대한통운의 부도는 물류업계에도 악영향이 되고 말았다. 투자가 줄고, 거래가 위축되면서 전체 물류산업에 큰 타격이 됐던 것이다.


한 회사에 두 명의 관리인 선임…사사건건 의견충돌 대한통운은 극적으로 퇴출은 면했지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문제가 있었다. 한 회사에 두 명의 관리인을 두면서 사사건건 의견충돌을 빚었다. 곽영욱 관리인은 필자를 만나면 장하림 관리인의 문제를 지적하곤 했다. 업무와 결재 등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법원에서는 두 사람을 관리인으로 선임하면서 구두로 역할을 구분해 줬다. 곽영욱 관리인은 전문경영인으로, 장 관리인은 채권자와 원만한 협의를 위한 대리인의 역할을 해달라는 거였는데, 장 관리인이 모든 분야를 공동으로 관여하겠다고 공표함으로써 마찰을 빚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런 문제를 2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 2000년 12월25일자‘공동관리인의 역할’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옮겨보면“대한통운의 법정관리 조기 졸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내부 단결이다. 양 관리인이 서로 화합하고 단합하여 공동관리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 해주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런 갈등이 표출되자 법원은 2003년 7월 곽영욱 사장을 단독 관리인으로 재 선임했다.


이때부터 대한통운은 법정관리 체제하였지만 사실상 곽영욱 사장의 시대였다. 그리고 1년 뒤인 2004년 12월27일 대한통운 직원들이 그토록 바라던‘리비아리스크’가 극적 타결됐다. 리비아 정부와 원만한 합의를 이루면서 법정관리 졸업의 최대 걸림돌이 해소됐던것이다.


오래 갈 것 같았던 곽 사장의 시대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5년 6월 법정관리인으로 이국동 부산지사장이 선임됐다. 곽 사장의 퇴임을 전후해 온갖 루머가 돌았다. 곽 사장의 비리관련 투서가 법원에 날아들었다는 것 등 헤아릴 수 없는 루머가 떠돌았다.


필자는 곽 사장이 퇴임하기 하루 전인 2005년 6월15일 대한통운에서 그를 만났다. 표정을 보니 뭔가 아쉬운 듯 하면서도 담담한 모습이었다. 1999년 5월에 취임했으니 6년 정도 사장직에 있었던 셈이다. 필자와는 취임초기 상당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취임 직후 썼던‘경영직보제도’관련기사로 인해 출입금지조치 까지 당했다. 곽 사장과는 사장실에서 약 1시간 정도 대화를 했다. 신임 사장 선임 건 등 회사와 관련된 것과 곽 사장의 향후 거취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운명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곽 사장은 그로부터 3년 후 한명숙 전 국무총리 뇌물수수 사건에 연루되면서 특가법상횡령혐의로구속되는신세로전락한다.‘ 영혼경영’을 부르짖으며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모래 위에 쌓은 탑이었다. 그에게는‘비리 경영인’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곽 사장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지면을 할애해 얘기하겠다.


금호아시아나에 매각된 후 다시 CJ로 넘어가 신임 대한통운 사장에는 이국동 부산지사장이 선임됐다. 필자는 이 사장과도 여러 일화가 있었다. 2008년 3월 대한통운은 M&A(인수합병) 시장에 나왔고, 우여곡절 끝에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인수되면서 법정관리를 졸업했다. 금호아시아나는 우리나라에 택배개념이 없던 1989년 금호특송을 설립해 택배사업을 시작했었다. 고속버스와 연계한 정기화물 서비스를 실시했지만, 출범 5년 만에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현대택배(현 현대로지스틱스)에 매각했다. 그 후 금호그룹 오너일가는 택배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다 대한통운이 M&A시장에 나오자 강한 집착을 보였다. 박삼구 회장이 직접 챙겼다. 금호는 막강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2008년 1월 그토록 원하던 대한통운을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보통 회사의 주인이 바뀌면 관례적으로 사명을 변경하는데 금호는‘대한통운’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만큼 좋은 사명을찾기도어렵고‘, 대한통운’이갖고있던상징성이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호는 대한통운을 갖는데는 성공했지만, 물류사업에 대한 꿈은 펼치지도 못했다. 대한통운이 금호 품에 있었던 것은 4년이 채 안 된다. 대우 건설을 인수하는 등의 무리한 M&A, 그룹 내 경영악화 등으로 알짜 계열사인 대한통운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금호는 눈물을 머금고 대한통운을 다시 M&A시장에 내놓았다.


이런 상황을 혹자들은‘승자의 저주’로 불렀다. 그리고 2011년 12월 CJ그룹에 매각됐다. CJ도 대한통운의 사명변경 등을 추진했다. 글로벌한 이미지를 고려했으나 결국‘대한통운’앞에‘CJ’를 붙이는 선에서 사명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대한통운은 CJ그룹에 인수된 지 1년3개월 만에‘CJ대한통운’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50년 만에 대한통운 상호가 변경되기는 했으나, 기존의 정통성은 계속 사명에 남아있게 됐다. 국영기업에서 민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세 번에 걸쳐 주인이 바뀌었으나‘사명’을 지킨 유일한 물류 회사가 됐다. 격변의 세월을 지나면서 한때 비운의 회사로 불렸던 대한통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종합물류기업으로서 물류산업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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