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이, SCM 관점에서 금융업 진출까지
글. 이영재| 이윤영 기자
에치고야와 영주의 관계
미쓰이가문은 원래 마쓰사카 출신으로 마쓰사카가 속한 와카야마 번에 속한 상인집단이다. 에도시대의 영주들은 다른 번에서 상업을 영위하는 영민에 대해 일시적인 체류는 허용하였으나 거주지를 옮기는 것에 대해서는 통제를 가했다.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면 세금을 걷을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미쓰이가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교토, 에도에서 경영을 실행하기에 제약이 따랐다. 그래서 미쓰이가문은 쇼군가문의 복식이나 생활용품을 조달하는 어용상인으로도 사업영역을 확장한다.
미쓰이가문은 교토에 거주하지 않고서는 막부에 조달할 물품을 선별하는 것이 어렵다는 구실로 처자와 함께 교토로 거주지를 옮길 것을 와카야마 번에 청원했다. 이렇게 되자 번에서도 무작정 기각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어용업무를 담당하는 기간에만 한시적으로 교토에서의 거주를 허가했다. 당시 처자와 거주지를 옮긴다는 것은 곧 본적지를 바꾼다는 의미로 인식되었다. 상인의 본적지가 바뀌면 기존의 번에서는세수가 줄어드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와카야마 번은 미쓰이가문을 번에 계속 묶어두고자 고육책을 쓴 것이었다. 산킨코타이와 같은 제도로 인해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영주들에게 영민으로 부유한 상인이 있다는 것은 무사의 체면을 떠나 세수확보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니시진 직물(西陣織)과 에치고야
에치고야의 다른 성공요인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기본적으로 에치고야가‘포목점’ 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포목점이란 면화, 견사 따위의 원료를 가공해 피륙, 의복 등을 짜는 점포이다. 에치고야는 에도에서 원단을 직조하기보다 교토 등지의 원료산지에서 1차로 가공된 원단을 에도로 운송하는 방식을택했다. 원료는 가공품에 비해 부피가 컸기 때문에 1차 가공을 통해 부피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최고의 품질과 인기를 구가하던 니시진직물(西陣織)은 교토 니시진(西陣)에서만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적시에 조달하기 위해 에치고야 교토본점이 설립되었다. 교토본점은 니시진직물과 고급 원사의 조달이 주 업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교토본점은 니시진직물의 직매입, 대량매입과 원사가공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판매를 담당하는 에도본점과 함께 에치고야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미쓰이 다카토시 역시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원료확보를위해 직접 교토에 상주하며 경영했다고 전해진다.
에치고야는 원료, 원료가공과 점포판매 등 상품유통의 거의 전 과정에 걸쳐 직거래를 중심으로 유통과 정을 최소화했다. 에치고야의 방식은 다른 상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기존의 유통질서가 민간상인자본위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에치고야 이외에 교토의 유력 포목상들도 니시진 직물의 직거래를 위해 앞다투어 점포를 설치했다. 교토에 상인자본이 유입된후 외상거래, 할인판매가 성행해 정찰현금결제를 원칙으로 하던 기존의 니시진 상거래 관행에 변동이 일어났다.
생사 유통구조의 변화
에치고야가 취급하던 포목의 원료는 다름 아닌 생사(生 )였다. 생사는 대부분 중국-조선을 거쳐 수입되거나 남만무역(南蠻貿易)으로 수입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전에는 교토 니시진의 직물업자들 이외에 이를 가공할 기술을 보유한 집단이 없었다. 때문에 니시진에서만 생산되는 니시진직물은 부르는게 값이었다. 그러나 17세기를 전후해 임진,정유양란으로 인한 조일외교단절과 명\청교체기, 정묘병자호란과 같은 대륙 정세의 혼란으로 수입산 생사를 조달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나가사키(長崎)이외의 항구에서 남만무역이금지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후반부터 막부는 니시진 직물업자에 공급되는 츄고쿠(中國, 일본 혼슈 서부지역) 산지의 생사공급에 대해 지원책을 펼쳤다. 막부의 생사 국산화계획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18세기 초 일본산 생사와 직물생산의 증가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막부의 지원책도 이전과 달리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 중 하나로 수입산 생사 감소로 일본산 생사 겸용을 장려했다. 또한 교토 니시진으로 공급되는 생사가 증가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생사의 공급량이 현저히 줄어들어 가격등귀현상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막부는 직할령과 다이묘 영지를 불문하고 양잠을 장려해 일본산 생사 공급량을 늘리는 데에 주력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생사의 자체생산량을 증대시키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졌고, 교토 니시진의 직조기술이 유출됨에 따라 지방에서 생산되는 직물(田舍織)이 등장했다. 따라서 이전에 비해 교토 니시진 직물업자들의 독점적 지위가 약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섬유중매상들이 각 생산지에 진출해 생사를 직매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량매입한 원료를 교토혹은 관동지역에 판매하면서 도매업자로 변신한다.도매업자들은 생사 산출지와의 선도거래(밭떼기계약으로 생사공급을 장악했다. 일종의 매점매석인 것이다. 이는 니시진이 부르는 게 값이던 생사 및 직물의 가격이 도매업자들 주도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막부는 생사유통구조를 수습하기 위해 기존의 생사·직물도매상에게만 일본산 생사의 직거래를 승인하고 다른 상인들이 사사로이 생사 직매입을 행하지못하도록 통제했다. 규모가 있는 도매상들에게 법적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이들을 조직화해 유통구조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막부의 유통구조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보호정책을받지 못하게 된 니시진 직물업자들은 도태되고 말았다. 비교적 규모가 큰 사업장을 운영하는 직물업자들은 에치고야 등 포목점의 지점이 지불하는 선도금(주문상품을 담보로 한 융자) 이자획득으로 버틸 수있었다. 그러나 자금력이 약한 군소영세업자들은 대거 몰락했다. 대규모 상인자본, 특히 유통업자들에 의해 니시진 직물업자들이 예속된 것이다. 기존 직물의 유통구조는 니시진 직물업자들이 주도했지만 이제 신흥 상인계층 주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구조와 니시진 보호정책>
에도시대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생사와 직물의 유통구조는 더욱 단순화 되었고 고급 옷감의 수요도 늘게되었다. 그런데 막부는 이를 통제하려했다. 왜일까?이는 신분제 사회에 기인한 바가 크다. 에도시대 일본사회는 한국, 중국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사농공상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상인자본의 성장으로“오사카의 거상이 노하면 다이묘가 벌벌 떤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농공상 신분제도가 흔들리는조짐이 보였다.
유교사회에서 지배층은 봉건적 위계질서를 유지하기위해 각 신분 별로 지위와 역할을 규정했다. 일본도예외는 아니었다. 막부는 외양만으로도 신분의 구별이 가능한 의복에 주목했다. 막부는 고급직물생산기술을 보유한 니시진 직물업자들을 통제하고 제조기술의 유출과 고급직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니시진 직물업자들에 대한 보호정책을 폈던 것이다.
에치고야 원료조달 핵심“사점(絲店)” 과“금점(錦店)”미쓰이 사점(絲店)은 원래 교토본점에 딸린 지점으로 1697년에 개점했다. 개점시에는 이름대로 원사거래를 전문으로 했으나 1720년부터는 원사와 직물을 같이 취급하는 도매상으로 성장한다. 사점의 경영 내용은 하주가 운반해온 화물을 거래자가 나타날 때까지 일시 보관하고 매매성립시에 수입을 취하는 상품보관 및 중간상인으로서의 경영과 상품대금의 일부를 미리 하주에게 융자해 이자수입을 도모하는 금전대출업의 2가지로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상품거래과정에 직접 참여하기보다 하주와 매주사이에 개입해 수수료 및 이자를 챙기는 방법은 에치고야 뿐만 아니라 다른 포목상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경영방식이었다. 때때로 매매가 지체되면서 상품가가하락하는 경우에는 원료 수급자가 지불할 이자가 상품가를 넘어서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거래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다. 적시에원료공급이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미쓰이 금점(錦店)은 원래 에도본점의 한 부서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관동지방의 골금(견직물의 종류)생산이 본격화됨에 따라 매입을 위해 1687년 에도본점으로부터 분리개점했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원단조달을 전담하는 자회사 개념이다. 미쓰이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초의 금점은 당시의 주요한직물 생산지인 에도 인근 관동지방 각지에 점포를 설치해 직물 원단 등을 매입했다.
에치고야 금점운용의 특징은 원단구입에 지장을주지 않는 선에서 다른 물품도 같이 취급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휴자금으로 금전대출업에 진출해 자금의 효율적 운용을 꾀했다. 물론 모든 점포가 여러 업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금화, 은화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금의 수송에도 많은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수지가 맞는 지점이 아니고서야 굳이금전대출업을 영위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직물원단은 되도록 현지에서 가공해 운송비를 감축했다. 목화, 원사 상태의 원료를 운송하는 데에 무게의 문제보다도 부피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형광펜) 더군다나 일본은 국토의 80% 이상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내륙 운송에 어려움이 많았고 그에 따라 원료의 변질로 손해를 볼 위험이 컸다. 시나노(信農), 고즈케(上野), 에치고(越後), 시모즈케(下野) 지방에서 매입하는 원단을 중간지점인 고즈케 국의 점포에 모이게 함으로써 상품과 자금수송을 효율화했다.(지도 참조) 일본 국내의 생사/원단 생산량이 늘자 재료 매입량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 때문에 에도-교토본점 간에 원료를 적시에 공급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기존의 원료조달이 산지 도매상에게 방식이었다면 아예 생산지로 진출해 선도거래(밭떼기4))를 통해 유통과정을 단순화한 것이다.(형광펜) 무엇보다 선도거래의 장점은 선입금 이후 물품을 인도받기 때문에 시세에 대한 리스크가 적다.
원료 매입은 항상 에도 본점의 주문에 맞춰 주문하되 매월 교토본점에 그 장부를 보고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교토본점의 상품매입기능이 원료 및 제품산 지와의 직거래를 염두에 두고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있다.
SCM 관점에서 금융업으로 진출하다
에치고야는 에도에서 판매하는 의류와 포목의 상당량을 교토, 오사카에서 조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도에서 다시 교토, 오사카의 구입처에 대금을 송금해야 했다. 한편 막부는 서일본의 막부직할령에서 상납되는 세수를 거두어 들여 에도로 송금했다. 이러한 수송절차는 지난 5월 호에서 언급했던 동·서회항로를 통해 이루어 졌다.
미쓰이는 에도의 의류, 포목점에서 판매대금을 막부에 직접 납부하는 대신 오사카에서 막부로부터 판매대금을 받아 교토, 오사카에서사용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막부 입장에서도 막대한양의 은자, 금자를 직접 수송하는 것은 비용문제가있었기 때문에 이를 허가했다.
이로써 에치고야의 자금운용은 더욱 편리해졌다.요컨대 에도에서 오사카로의 상품대금의 송금과 오사카에서 에도로의 공금수송이 상쇄되는 것이다. 이로써 미쓰이 가문은 환전업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에도-오사카간 송금과 어음 등을 취급했는데 이러한 금융적 기반은 메이지유신 이후 미쓰이은행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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