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정현 기자
아찔한 컨베이어
우리는 컨베이어와 관련된 사고담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본 기자가 예전에 근무하던 물류센터에서도 컨베이어 때문에 큰 사고가 날 뻔했다. 한 현장 근로자가 컨베이어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가 머리카락이 컨베이어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옆 동네 센터에서는 한 작업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 위로 넘어져 팔이 말려들어가면서 큰 부상을 당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무시무시한 사고담에도 불구하고, 컨베이어는 잘 바뀌지 않는다. 작업자에게 컨베이어를 취급할 때 이러저러한 것을 주의하라고 당부할 뿐이다. 사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는 컨베이어 아래로 물건이 떨어져 주울 때 전원을 다 끄고 주우라는 등 안전에 관한 세부 사항이 설명돼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장 직원들은 일상적인 업무에 적응함과 동시에 안전문제에 소홀해진다. 그러면 컨베이어는 잠재적으로 위험해지는 것이다.
▲ 사업안전보건기준에 언급된 컨베이어 사용 및 취급 주의사항
컨베이어는 물류센터에서 상품의 흐름을 담당하는 ‘물류의 동맥’이다. 일반적인 물류 및 제조 현장에서 사용되는 컨베이어는 크게 벨트와 롤러로 구성돼 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아는 컨베이어는 2차 산업혁명 당시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다. 독일 물류 시스템 업체의 한 관계자는 “컨베이어 업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며 “지금 컨베이어의 모습은 40~50년 전의 모습 그대로이며, 이 구조가 1950년대부터 계속 사용되어왔다”고 전했다.
현재 일반적으로 물류현장에서 사용되는 컨베이어는 철로 만들어졌으며, 디귿(ㄷ)자 프레임에 롤러를 별도로 연결하고 그 위에 벨트를 감아서 돌리는 구조로 되어있다. 물론 이러한 구조를 바꾸기 위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 20년 전에는 롤러 안에 모터를 집어넣는 ‘롤러 파워 컨베이어’가 개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 롤러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벨트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으면 구동될 수 없는 구조였다.
결국 전통적 컨베이어에서 조금씩 바뀐 컨베이어가 시장에 나오긴 했지만 기존 컨베이어에 파격을 가하는 것은 없었고, 이와 동시에 컨베이어의 안정성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스위스 자동화장비 스타트업 아반콘(Avancon)의 박현민 아시아 지사장은 컨베이어를 둘러싼 지금까지의 변화는, 자동차로 치면 겉모습만 바꾸는 ‘페이스리프트(Face-lift)’ 정도라고 말한다.
컨베이어 시장을 뒤흔든다
아반콘은 스위스에서 시작된 컨베이어 스타트업이다. 아반콘은 컨베이어 사고의 원인을 작업자의 소홀함이 아니라 컨베이어 구조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여 기존 컨베이어와 모습 자체가 다른 컨베이어를 개발했다. 박 지사장에 따르면 아반콘의 컨베이어는 기존 컨베이어와는 운영방식, 소재뿐 아니라 개념 자체가 다르다.
아반콘은 단순히 컨베이어의 모습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새로운 모습의 컨베이어를 통해 전통 컨베이어 시장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반콘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박 지사장은 “일반적으로 물류 자동화 시장은 보수적이다. 때문에 컨베이어 역시 과거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반콘은 컨베이어의 모습뿐 아니라 보수적인 산업 구조 역시 바꾸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보수적인 전통 컨베이어 시장을 바꾸기 위해 아반콘은 각 국가 지사장을 35세 미만으로 선별하는 등 조직을 젊게 꾸렸다. 젊은층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잘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반콘은 아시아 총괄로 박현민 지사장을 선임했으며, 2017년에는 미국 총괄을 선임하여 유럽, 미주, 아시아 등지로 진출을 꾀하고 있다.
다니엘 강베타(Daniele Gambetta) 아반콘 CTO(Chief Technology Officer)는 “디지털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전자적 연결’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전통 컨베이어 시장을 변화하고자 하는 아반콘의 콘셉트에 매료되어 이 젊은 스타트업에 합류했다”라고 말한다.
▲ 데니스 래츠(Denis Ratz)대표(왼), 다니엘 강베타(Daniele Gambetta) CTO(오른쪽)
우연한 사고가 아반콘을 만들다
아반콘은 디터 스펙트(Dieter Specht)의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탄생했다. 스펙트 오너는 1958년 스위스 물류기기 생산업체 인터롤(Interroll)을 창업한 것을 시작으로, 28개의 자동화기기 관련 특허를 취득하는 등 현재의 인터롤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컨베이어 분야에 있어서는 1세대 개발자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도에 은퇴한 그는 인터롤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컨베이어 사고를 당한 여성의 수술 장면을 보게 됐다. 사고 여성은 컨베이어 밑으로 들어가다가 머리카락이 롤러 사이에 끼어 살가죽이 벗겨졌다. 스펙트 오너는 1세대 컨베이어 개발자로서, 자신이 만든 장비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심각한 상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보다 안전한 컨베이어를 개발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당시 인터롤에서는 다른 컨베이어 솔루션 문제 때문에 스펙터 오너의 결심을 현실화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아반콘을 설립하고 비즈니스 정보학 학사 데니스 래츠 대표와 전자 제어 및 DC모터 전문가 박사 다니엘 강베타 CTO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영입했다.
▲ 박 지사장이 박스에서 상품을 꺼내 직접 조립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가볍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면서 상품을 소개할 수 있다.
그래서, 뭐가 다른가
박 지사장은 아반콘의 컨베이어가 산업에서 상용되는 기존 컨베이어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박 지사장은 “일반 자동차와 전기차의 차이가 자동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꿨듯이 아반콘 컨베이어 또한 컨베이어 산업을 바꿀 자동화기기라 확신한다”고 말한다.
우선 아반콘 컨베이어는 롤러 위에 손을 대도 밀려들어가지 않는다. 외관상 아반콘 컨베이어가 일반 컨베이어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롤러의 모양’이다. 롤러가 가로로 기다랗지 않고, 대신 작은 롤러가 여러 개 연결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아반콘 컨베이어는 롤러를 이어주는 ‘벨트’ 없이 작동하며 컨베이어 제작에 들어가는 부품수도 적다. 아반콘은 자사 컨베이어 부품 가짓수가 경쟁사와 비교해 절반이 채 안 된다고 설명한다.
적은 수의 부품을 결합해 서로 다른 종류의 컨베이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반콘 컨베이어가 갖는 장점이다. 가령 폭스바겐은 하나의 플랫폼에 각기 다른 제품을 접합시키는 것으로써 여러 모델의 차를 만들어낸다. 박 지사장은 “아반콘 컨베이어도 이와 유사하게, 기본 바탕(프레임)은 그대로 두고 용도에 따라 롤러를 바꾸면 다른 시스템이 된다”고 강조했다.
▲ 아반콘 컨베이어의 프레임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
아반콘 컨베이어의 소재 역시 일반 컨베이어와 다르다. 일반적인 컨베이어 프레임은 철제로 제작된다. 반면 아반콘 컨베이어는 산화방지 처리된 알루미늄(Aluminum)으로 만들어진다. 알루미늄은 전 세계적으로 쇠 다음 많이 사용되는 소재로서 강철보다 약 67% 가볍다.
또한 아반콘은 롤러의 일부분을 폴리아미드(나일론)로 제작해 롤러 한 개가 버틸 수 있는 하중을 높였다. 특히 롤러는 암모나이트를 연상시키는 자연 구조(바이오닉 공학 기반)를 차용해 무거운 물건을 올려도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또한 지게차의 타이어 재질인 폴리우레탄(Polyurethane)을 사용해 롤러 겉면을 만들어 마찰력을 높였고, 박스가 지나갈 때 발생하는 소음 역시 줄였다.
‘가성비’의 핵심, 모듈화
아반콘에 따르면, 아반콘 컨베이어의 가격은 특이한 디자인과 소재 때문에 비쌀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일반 컨베이어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저렴하다. 박 지사장은 아반콘 컨베이어의 가격을 단순히 미터당 단가로만 계산해서는 안 되며, 컨베이어의 안전함, 설치 및 유지비용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 지사장은 “전기차와 일반차의 운용 가격을 비교할 때 자동차의 판매 가격만을 고려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특히 아반콘 컨베이어는 설치 자체가 간단해 전문 인력 없이도 물류현장에 쉽게 설치될 수 있다. 일반 컨베이어는 쇠로 만들어져 무겁기 때문에 지게차로 컨베이어 프레임을 운반에 현장에서 설치해야 한다. 반면 아반콘 컨베이어는 각 부분이 ‘모듈(Module)화’ 되어있어 전문 인력을 고용하지 않고도 설명서만 보고 공구 없이 조립을 할 수 있다.
또한 아반콘 컨베이어는 모듈 형태이기 때문에 존(Zome)단위 활용이 가능하다. 기존 컨베이어는 ‘엔드유저(최종사용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각기 다른 폭이나 길이로 주문제작 해야 한다. 만약 제작된 컨베이어의 폭이 40cm인데 이를 50cm로 늘리고 싶다면 아예 다른 롤러를 구매하거나 쇠로 된 롤러를 커팅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아반콘 컨베이어는 모듈단위로 조립해서 만들기 때문에 엔드유저의 필요에 따라 부착하는 개수를 다르게 조절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듈 형태로 연결된 롤러는 존을 형성하며, 이 존은 별도로 제어 및 구동된다. 이를 ZPC(Zone Powered Conveyor)시스템이라고 한다. ZPC컨베이어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른 이송이 가능하며, 어느 지점에서도 별도의 버퍼 장치 없이 ‘브레이크’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아반콘 컨베이어. 존 하나에 모터 하나가 들어가 있으며 이 모터가 박스 간격을 조절한다.
▲ 아반콘 컨베이어 내부 모습
컨베이어의 브레이크 기능은 출하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일반적 컨베이어는 하나의 모터가 수십 미터 컨베이어를 제어하기 때문에 박스 10개를 내보낼 경우 사람이 간격을 조절하여 출하해야 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어큐뮬레이션 컨베이어(Accumulation Convyor), 즉 어큠 컨베이어이다. 어큠 컨베이어는 공압으로 간격을 조절하는 컨베이어로 공기를 따로 주입하고, 큰 액추에이터(Actuator: 전기, 유압, 압축 공기 등을 사용하는 원동기의 총칭)가 전체 컨베이어를 돌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때, 압축 공기가 박스 간 간격을 조절하는 버퍼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아반콘 컨베이어는 그 자체로 존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액추에이터 등 부수적인 장비가 필요하지 않다. 존 하나에 모터 하나가 들어가 있으며, 이 모터가 박스 간격을 조절하는 것이다. 또한 이 모터는 교류전압(AC)이 아닌 건전지, 휴대폰 등에 사용되는 직류전압(DC)으로 제어되기 때문에 제어 자체도 편리하고 모터의 단가도 저렴하다. 박 지사장에 따르면 AC모터는 설치 후 모터의 전압을 따로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별도의 파워케비넷 등이 필요한 반면 DC모터는 그렇지 않다. 때문에 AC모터 한 개와 여러 개의 DC모터 가격 차이는 크게 나지 않는다.
▲ 소터 겸 디버터 역할을 하는 롤러
'간접판매'로 글로벌 시장 공략한다
아반콘은 컨베이어 제조업체이긴 하지만 직접 최종소비자에게 제품을 판매하지는 않는다. 대신 아반콘은 물류 자동화기기 제조업체 및 자동화 SI(System Integrator)업체에 제품을 납품하여 판매하는 유통구조를 택했다. 때문에 아반콘의 영업 주체 또한 SI업체와 OEM 제작을 희망하는 업체로 한정돼 있다. 데니스 대표는 “최종 고객(End user)인 유통 및 물류 기업에게 직접 판매를 할 계획은 없다”며 “업계에 종사하는 관리자가 개별적으로 구매를 의뢰하더라도 SI업체를 거쳐야만 구매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박 지사장은 “우리의 브랜드를 세계에 알릴 생각은 없다”며 “현재 구축된 기업 및 상품 디자인은 기업의 철학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대신 우리는 철저히 고객 위주로 기업을 운영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아반콘은 컨베이어 제조업체에게 부품만 납품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컨베이어를 제조하기 위해서 필요한 롤러는 대부분 해외에서 사온다. 국내에서 컨베이어 개발에 수억을 투자하고 이를 판매할 만큼 시장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SI업체가 아반콘 로고 대신 자체 로고를 입혀 아반콘 컨베이어를 판매할 수도 있다. 아반콘은 글로벌 유명 SI업체와만 거래를 하고 있다. 현재(2017년 4월 기준) 연결 중인 기업을 포함해 스위스로그, 쉐퍼시스템즈, 디마틱 등의 글로벌 SI업체를 대상으로 영업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SFA, LG CNS 등을 대상으로 국내 인지도를 높여갈 것으로 기대된다.
아반콘이 직접 유통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아직 규모가 작은 시장에서 여러 SI업체들과 동시에 거래함으로써 조금 더 빠르게 자동화 장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다. 즉 고객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박 지사장은 “아반콘의 영업 철학은 당장 한 두 개의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반콘은 지난 수년간 컨베이어 개발, 기계, 금형, 특허 및 생산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현재(2017년 4월 기준)는 양산과정에 들어섰다. 특히 아반콘은 작년 스위스에 80억을 투자해 공장을 설립했다. 이 공장이 하루 생산할 수 있는 최대 컨베이어 길이는 400m이다. 아반콘은 유럽에서는 2016년 4~5월, 국내에서는 2016년 말부터 영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빠르면 올해 5월, 늦어도 8~9월 중으로 아반콘 컨베이어의 실제 도입사례가 나올 것이라 예측된다.
데니스 대표는 “이제 모든 제작 과정과 테스트가 완료됐다. 모든 준비를 마쳤으며 이제는 잠재 고객들이 스위스에 위치한 대규모 테스트 시설을 방문하고 있다”며 “이 혁신적인 시스템의 기능과 많은 장점이 지난 수십 년간 바뀌지 않았던 컨베이어 시장에 균열을 낼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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