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S 기술 활용해 주소 체계 없는 중동 문제 해결
자가 차량 보유 않고도 하이엔드 브랜드부터 음식까지 배달
글. 김정현 기자
무언가를 배달할 때 주소는 매우 중요하다. 인터넷에서 물건을 사면 택배기사는 주문자가 주문 시 기재한 ‘주소’로 물건을 가져다준다.
한편 2012년에는 물류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 아래 국내 주소 체계가 지번 체계에서 도로명 체계로 재정비됐다. 이로써 우편배달과 택배배달은 전보다 한결 수월해졌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 비해 주소 체계 변경이 늦었다는 비판도 있었고, 왜 멀쩡한 주소 체계를 뜯어 고치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어쨌든 국내에서도 새로운 주소 체계가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소 체계가 없는 나라에서는 배달이 어떻게 이뤄질까. 가령 대부분의 중동 국가는 잘 정비된 주소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부르즈 할리파’가 하늘을 뚫을 기세로 우뚝 솟아있고, 휘황찬란한 인공섬이 존재하는 UAE(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도 주소 체계만큼은 현대화돼 있지 않다.
“우리 집이 어디 있냐고? 큰 모스크(예배당) 바로 옆에 있어.” 두바이에서 떠도는 ‘두바이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시리즈’ 유머 가운데 하나이다. 두바이에는 모스크가 골목마다 있다. 그러니까 집이 모스크 옆에 있다고 하는 것은 집을 찾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게 한낱 유머가 아니라면. 실제로 두바이에서는 자신의 거주지를 설명하는 사람과 설명을 듣고 그곳으로 찾아가야 하는 사람 모두 애를 먹는다. 두바이에서는 택시를 부를 때 유명 건물이나 대로변에서 기다려야 한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할 때도 도로의 이름보다는 ‘랜드마크’의 이름을 말한다.
택배기사가 물건을 전달할 때도 마찬가지다. 두바이에서는 명확한 우편번호, 주소, 우편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공식적인 주소가 없다. 이 때문에 두바이에서 활동하는 전자상거래 업체는 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답답한 건 소비자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주소 체계가 없기 때문에 택배를 받기 위해서는 택배기사와 반드시 통화해야만 한다. “약국 옆에 골목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쭉 들어오시다가 왼쪽에 보이는 세 번째 집이예요. 지붕은 파란색이고요.” 소비자는 길 잃은 여행객에게 길 안내를 해주듯 택배기사에게 자신의 위치를 상세하게 설명해야 한다. 조금 외진 곳이나 복잡한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경우 택배기사와 다섯 번 이상 통화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두바이를 비롯한 중동의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기업이 하나 있다. 두바이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 패쳐(Fetchr)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012년 패쳐의 창업자이자 대표인 이드리스 알 라이파이(Idriss Al Rifai)는 중동 라스트마일 배송의 가장 큰 걸림돌인 ‘주소 없음(No Address)’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체 솔루션을 개발했다. 패쳐는 우버(Uber)처럼 부정확한 주소 대신 택배 수령자의 스마트폰 GPS 위치를 추적하여 물건을 전달한다.
패쳐의 기술은 배송기사에게 새로운 배송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최적의 루트를 자동 계산하는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배송기사와 고객을 연결한다. 고객의 GPS 위치는 클라우드(Cloud)에 통합된다. 이를 통해 배송기사와 고객은 정확한 도착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 (좌)이드리스 알 라이파이(Idriss Al Rifai)와 (우)조이 아쥴리니(Joy Ajlouny) 패쳐(Fetchr) 창업자
물류 혼돈 속에서 배달을 외치다
잘 정돈되지 않은 두바이의 주소 체계는 택배 배달의 지연을 야기했다. 이커머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불만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이드리스 대표는 패쳐를 창업하기 전에 이커머스 업체인 ‘마르카VIP(Marka VIP)’에서 일하면서 이커머스 업체가 겪는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게 됐다. 이드리스 대표는 마르카VIP 내부에 자체 이커머스 물량을 신속하게 배달할 수 있는 물류부서를 신설했으나, 정작 실제 배달을 담당하는 물류부서가 이러한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문제는 실질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이드리스 대표는 라스트마일 분야의 고객 중심의 기술이 전자상거래와 배달 시장에 커다란 파급효과를 끼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2012년 패쳐의 공동 설립자인 조이 아쥴리니(Joy Ajlouny)를 만나 초기 자금 120만 달러로 라스트마일 배달 솔루션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둘은 2014년 마침내 패쳐를 창업하고 애플리케이션을 공식적으로 출시했다. 당초 패쳐의 어플은 이커머스 업체를 위한 ‘엔드 투 엔드(End to end)’ 물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이후 B2C 비즈니스로까지 그 활용 영역이 확장됐다.
패쳐의 기술은 스마트폰의 ‘지오 로케이션(Geo-location: 지형위치)’을 활용한다. GPS를 통해 고객의 현 위치를 파악하여 물건을 배송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가령 화물 수령자가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택배기사는 실시간으로 고객의 위치(헬스장)를 파악하여 그곳으로 물건을 배송한다. 즉 패쳐는 기술을 통해 주소 체계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개인과 기업 모두를 위한 라스트마일
패쳐는 주소 체계 미비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빠른 배송, 더 좋은 품질의 배송을 원하는 고객의 니즈도 만족시키고자 한다. 실제로 패쳐는 고객이 원하는 시간에 물건을 받을 수 있는 배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패쳐의 서비스는 사용 주체에 따라 C2C와 B2C로 나눌 수 있다. 우선 C2C 서비스를 살펴보자. 일반 개인은 중고물품을 거래하거나 지인에게 선물을 보낼 때 패쳐 어플을 이용한다. 가령 조카에게 곰인형을 보내려는 고객이 있다. 앉은 자리에서 인형의 사진을 찍어 패쳐 어플에 업로드한 후 상품 품목과 보내고자 하는 날짜 및 시간을 지정하고, 수령자와 결제 방법을 선택하기만 하면 모든 주문이 완료된다.
패쳐는 고객에게 두 가지 배달 옵션을 제공한다. ‘스탠다드 배달서비스’와 온디맨드(On-demand) 배달서비스인 ‘패쳐나우(Now)’가 바로 그것이다. 패쳐의 기본 배송 옵션인 스탠다드 배달은, 고객이 2~3시간 간격의 타임슬롯(Time Slots)을 지정해 놓으면 다음날 지정된 시간에 물건을 배송해주는 서비스다.
최근에 서비스를 시작한 패쳐나우는 스탠다드 배달서비스의 프리미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고객은 일정 금액을 추가적으로 지불하면 당일에 물건을 받아볼 수 있다. 고객이 주문을 완료하면 다음날 배송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주문 당일 ‘45분 안에’ 상품이 배송되는 것이다.
▲ 패쳐 활용도
다음은 B2C 서비스를 살펴보자. 패쳐는 기업 고객에게 ‘비즈니스를 위한 패쳐(Fetchr for Business)’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현재 지역 업체와 일반 유통업체, 그리고 많은 전자상거래 업체가 패쳐의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기본적인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고객이 이커머스 업체의 제품을 주문하면 이커머스 업체는 제품을 포장한다. 주문 발생 당일 패쳐의 운전기사는 이커머스 업체의 물류센터에 방문해 고객이 주문한 제품을 픽업하여 두바이에 위치한 패쳐의 자체 물류센터로 운반한다. 물류센터에서는 제품을 스캔하고 보관하는 한편 고객에게 배달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발송한다. 이후 고객이 원하는 배송 날짜와 시간을 지정하면 패쳐의 기사가 제품을 고객에게 배송한다.
한편 패쳐는 결제 옵션에 COD(Cash On Delivery)를 포함하고 있다. COD는 중동지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결제방식이다. 패쳐는 사업 초기 라스트마일 배송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많은 고객이 지불 옵션으로 COD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로 패쳐가 타깃으로 삼는 대다수의 고객이 COD 방식을 선호했다. 패쳐가 COD를 자사의 결제 옵션에 포함시킨 까닭이다. 현재 패쳐를 이용하는 고객 중 약 85%가 결제 방식으로 COD를 선택하고 있다.
누가, 무엇을 배달하나
이렇듯 패쳐는 개인과 기업 고객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라스트마일 배달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반 직장인이나 가정주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패쳐를 이용하고 있으며, 다양한 산업의 기업체들 역시 패쳐를 통해 자신의 상품을 고객에게 배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패쳐는 무엇을 배달할까. 배달은 또 누가 할까. 패쳐는 자신들이 거의 모든 종류의 물건을 운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류나 잡화 같은 이커머스 업체의 물건뿐 아니라 취급에 유의가 필요한 ‘하이엔드’ 브랜드 상품도 운반한다는 것이다. 패쳐는 도넛이나 도시락, 신선식품도 운반한다. 이와 같은 신선식품 배달서비스는 기업뿐 아니라 개인 고객도 이용할 수 있다. 심지어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도 패쳐를 통해 받아볼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패쳐는 자가 차량을 보유하지 않는다. 타리크 사나드(Tariq Sanad) CFO는 “패쳐는 실물 자산을 슬림하게 운영하기 위해 모든 차량을 리스하고 있고, 운전자는 자체적으로 고용하여 급여를 주고 있다”며 “패쳐는 엄격한 고객서비스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패쳐의 드라이버가 되려면 일정 기간 이상의 배달 경력 등 몇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만 한다”고 설명한다.
▲ 패쳐는 신선식품뿐만 아니라 레스토랑 음식 또한 배달한다.
주소 없는 지도에서 출발
현재(2017년 7월 기준) 패쳐는 두바이를 중심으로 메나(MENA) 지역으로 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 출발은 주소 없는 지도를 보며 여행하는 것처럼 험난했다. 메나 지역의 많은 국가들이 높게 세워놓은 규제 장벽에 부딪치기도 했다.
메나 지역은 규제가 매우 엄격한 시장으로 유명하다. 이에 새로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기업이 많은 어려움을 겪곤 한다. 특히 패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전 이드리스 대표는 왕국의 기관장을 만나 일부 협정을 조율하기도 했다.
이드리스 대표는 “사우디아라비아 당국 관계자는 패쳐를 통해 불법 품목이 운반되진 않을지 우려했다. 때문에 우리는 물건을 보낼 때 사진을 반드시 첨부하도록 하는 등의 조취를 취했고, 우선적으로 37개 도시부터 서비스를 제공하며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갔다”며 “규제로 인해 겪는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메나 지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신흥 스타트업의 성장 기반을 닦기 위해 정부 역시 곳곳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리즈B 넘어 ‘유니콘’ 꿈꾸다
패쳐는 현재(2017년 7월 기준)까지 약 5천2백만 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시리즈A에서는 1천1백만 달러를 달성했고 최근에 추가적으로 4천1백만 달러를 유치하면서 시리즈B의 반열에 올라서게 됐다. 패쳐는 이번 투자금을 제품 혁신과 서비스 지역 확장에 사용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패쳐는 실리콘밸리 VC회사로서는 최상위급인 NEA(New Enterprise Associated)로부터도 투자를 받으며, 메나 지역을 대표하는 물류스타트업으로 거론되고 있다. 포브스(Forbes)는 패쳐를 차세대 유니콘 스타트업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두바이에서 소규모 자본으로 시작한 패쳐는 창업 4년 만에 GCC 지역 전역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로 성장했다. 패쳐의 중장기적인 목표는 GCC를 넘어 메나 지역 전체로 사세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드리스 대표는 “패쳐는 신흥시장(Emerging Market)의 모든 이커머스 이용자들이 오로지 핸드폰만을 이용해 물건을 보내고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며, 나아가 소비자가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배송이 가능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패쳐는 고객 중심(Customer Centric)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중동의 기술 기반 라스트마일 제공자”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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