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물류의날> 에피소드로 본 한국 해운·물류 근대사 ②한진

INNOVATION

by 김편 2011. 11. 12. 15:12

본문


[CLO] 11월15일은 대한민국 ‘물류의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81년전인 1930년 대한통운이 ‘조선미곡창고’라는 이름으로 창고사업을 시작해 대
한민국 물류산업 근대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으로 이 회사의 창립기념일인 11월15일은 물류의 날로 지정됐다. 물류는 국가 경제와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혈맥이자 기업 번영과 경쟁력 제고의 원천이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 후, 황무지에서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수출입 물량의 운송을 맡고 있는 물류기업의 역할이 큰 힘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 80여년 세월의 흐름 속
에 에피소드로 남겨진 물류기업들의 활동 속에서 대한민국 물류 근대사를 조명해본다. <editor>

사지(死地)에 번 돈으로

육해공 ‘세상의 길’을 열다 
참조: 한진 조중건 부회장 자서전 ‘창공에 꿈을 싣고’ 중에서

“당신, 이야기(베트콩 습격으로 한진직원 5명 사망) 들었소? 내 두말도 안하겠소! 우리 운전수들 군인 출신이오. 방어용으로만 할테니 M16을 지급해 주시오.”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너 미쳤냐? 어떻게 민간인에게 군대 소총을 나눠주라는 거야.” (찰스 마이어 꾸이년지구 사령관)
“돈 벌러 와서 죽을 수는 없지, 우리도 방어는 해야 할 거 아냐.” (조 전 부회장)
“미스터 조, 이건 사이공 사령부도 모르는 일이오. 당신과 나만 아는 일이오, 알겠소? 그리고 절대 먼저 쏘지 마시오.” (마이어 사령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이 자서전에서 밝힌 이 대화는
한진이 사지인 베트남 정글에서 어떻게 달러를 벌었는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올해로 한진이 ‘수송보국’의 길을 걸은 지 66년. 이런 피와 땀들이 모여 오늘날 육·해·공을 아우르는 ‘세상의 길’을 개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서 있었다. 길이 있는 곳에 ‘한(韓)민족의 전진(進)’, 한진이 있다며 전장으로, 바다로, 하늘로, 수송 외길을 걸어온 고 조 회장. 이 때문에 한진그룹의 23개 계열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5대양 6대주에서 한민족의 영토를 세계로 넓히고 있다.

전쟁터에서 성장한 한진

“형님(조중훈 회장)이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베트남에 갈 때입니다. 돈될 만한 사업이 있을 것으로 확신했던 형님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베트남 꾸이년지역의 풍경에서 바로 사업 아이디어를 찾아냈습니다. 항만을 보니, 화물이 꽉 찬 배가 50척이 몰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것만 본 것이 아니라 배들이
짐을 실은 채 마냥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죠.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형님은 갑자기 창문에서 휙 돌아앉아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고 합디다. 다른 사장들이 쳐다볼까 싶어 큰일이라고 생각한 거죠.” 조 전 부회장은 한진의 베트남사업 첫발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진의 화물수송사업은 전후방이 없었던 베트남에서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러나 조 회장은 빗발치는 전장을 오가며, 뚝심과 오기로 밀어붙였다. 베트콩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직원들이 공포에 떨 때는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직접 수송 차량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그런 고생끝에 주어진 과실은 너무나 달콤했다. 한진이
1966년부터 5년간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달러는 무려 1억5000만달러.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한 가용외화가 5000만달러 남짓이었으니, 한진이 베트남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진은 베트남 특수로 당당히 재벌 반열에 들어선다. 
조 회장은 1967년 7월 자본금 2억원으로 대진해운을 설립했고, 그해 9월에는 삼성물산으로부터 동양화재를 5억7000만원에 인수했다. 또 68년 2월에는 한국공항, 8월에는 건설회사인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을 세웠다. 이어 인하대학교도 인수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소원과 대한항공 

고 조 회장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기이자 도전을 맞이한다. 다름아닌 항공사업이었다. “청와대로부터 호출이 왔었습니다. 어느 정도 짐작가는 내용이었죠.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 김성곤 공화당 의원 등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만년 적자 공기업인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독촉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형님한테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도 불안해서 저도 형님과 같이 청와대에 따라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게 소망이라는데 형님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조 전 부회장)

조 회장은 결국 69년 ‘말 많고 탈 많았던’ 대
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항공공사는 당시 프로펠러기 7대와 제트기 1대를 보유했지만, 전체 좌석수는 점보기 1대보다 적었다. 또 27억원의 부채는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임원들은 ‘베트남에서 목숨 걸고 번 돈을 부실 항공사에 모두 쏟아붓게 됐다’며 크게 우려했다.

그러나 고 조 회장은 과감한 투자와 국제선 개척으로 이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42년 후 대한항공은 화물수송 세계 2위, 보유 항공기 135대, 매출 11조4592억원(지난해)이라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미군과 인연 한진 성장의 든든한 ‘우군’
트럭 한 대로 국내 최대의 운수그룹을 일군 고 조 회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지 않고, 현장을 챙길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던 정열적인 경영자였다. 그가 모언론 인터뷰에서 “창업주에 게 은퇴란 없다”고 한 말은 그의 성격과 일 욕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 조 회장은 또 ‘남이 닦아놓은 길을 뒤쫓으며 훼방하는 얌체사업’을 싫어했다. 모르는 사업에 뛰어들어 ‘문어발식’ 확장도 자제했다. ‘낚싯대를 열개, 스무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르는 사업을 하기보다 수송 전문화에 더 집중했다.

주변에서 ‘돈 버는’ 무역회사를 만들자고 권유하기도 했
지만 고 조 회장은 그때마다 “우리가 무역회사를 하면 많은 무역회사들이 우리의 경쟁자가 될 텐데 그들이 우리 비행기를 타고 우리에게 화물을 맡기겠느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고 조 회장은 45년 광복 직후 인천에서 한진상사를 설립, 수송 외길의 첫발을 내디뎠다. 고만 고만하던 한진상사가 두각을 낸 것은 56년 미군부대 화물 수송을 맡으면서다. 이때 맺은 미군과의 인연은 한진 성장의 든든한 ‘우군’이 됐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