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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명분' 신해통공이 남긴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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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 2015. 11. 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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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기사는 CLO 통권 63호(9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일부 발췌했습니다


역사 속 물류이야기 ⑦ - 정조가 내세운 신해통공의 명분

민생과 시장경제 활성화

글. 이영재 기자


Idea in Brief

수년 전부터 택배업계는 업계의 실정에 맞는 택배법 제정을 요구해왔다. 현재 적용되고 있는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이 택배시장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모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법규를 제정한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규제가 생길 뿐이다. 그래서 정부가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때 비로소 민관이 모두 만족하는 법령이 생긴다. 또한 법규의 명분이 바로서지 않으면 반대의견을 극복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법규제정은 반대의견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기 때문에 명분을 세우는 것이 법규제정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법규는 물류*유통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조선후기 정조 시기의 신해통공(辛亥通共)을 통해 살펴보자.


조선후기 한양의 유통경제 발달과 시전의 확대

조선후기 한양과 한강유역은 각지에서 상납하는 조세곡(租稅穀)의 집산지였다. 18세기 후반 서울로 운송되었던 쌀, 콩 등의 곡물은 30만 석에 이르렀다. 한양은 자급자족 능력이 없지만 거대한 소비도시였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원활한 물자공급을 받아야만했다. 17세기 중반 한양의 곡물수요는 매년 50만 석에 달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주기적으로 서울과 강화를 잇는 육로와 수로를 정비했으며 시전(市廛)을 통해 물자를 유통시키고 물가를 조절하고자 했다. 시전은 서울 종로 일대에 정부주도로 형성된 상설시장으로 담당 관서인 평시서(平市署)의 관리를 받으며 조정의 물품을 조달하는 대신 시안(市案)에 등재되었다. 또한 상인들은 한강 연안과 한양 곳곳에 물류창고를 운영해 소비자와 상품 사이의 거리를 줄여 상업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예를 들어 한강변의 서강미전(西江米廛), 마포미전(麻浦米廛)은 쌀이 집하되는 곳이면서도 배후에 임노동자 등 소비자들이 밀집한 지역에 위치했다. 한양과 한강유역의 창고는 하역, 운반을 담당하는 상인, 노동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들의 소비로 한양은 도시와 상업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한양의 인구는 효종 9년(1657)에 약 8만 명이었으나 불과 20년이 채 안된 현종 11년(1669)에 20만 명에 육박했다.

 

한양의 급격한 팽창에 따라 도성 내부만으로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한양 도성 외곽지역의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이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할 난전(亂廛)이 생기기 시작했다. 난전이란 전안(廛案)에 등록되지 않거나 허가된 상품이외의 물건을 사사로이 판매하던 가게를 말한다. 도성외곽 난전의 소비자 중 상당수는 임노동자로 시장의존도가 컸으며 거대한 소비계층으로 자리 잡아 한양의 유통경제 발달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가파른 발전 속도를 보이는 난전상인에 대해 국가가 반사이익을 누리기 위해서는 국가가 관리하는 시전 체제 안으로 편입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난전상인에게 일일이 세금을 징수해 그들의 상업 활동을 보장하는 것은 한양 시장을 독점해 온 시전상인의 반발을 살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도성 외곽의 난전을 시전화 함으로써 국가재정을 보충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한양의 물자유통을 더욱 원활히 하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1670년(현종 12)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으로 인해 물자유통에 대한 경각심이 있었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신해통공의 배경, 금난전권의 폐단

신해통공은 정조 15년(1791) 정조가 한양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정책이다. 그렇다면 금난전권이란 무엇인가? 금난전권은 시전상인이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달하는 대가로 시장을 독점해 난전을 억제할 수 있었던 권리이다. 어용상인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불법 무허가업체나 다름없는 난전을 단속하는 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 것일까?

 

금난전권의 원래 취지는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공급하는 시전상인에게 상업 활동의 편리함을 보장해주고자 만든 법이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한양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생필품의 수요 역시 같이 늘어났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상인계층이 등장하면서 난전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전상인과 관리들은 난전을 허용하는 대신 일정 금액을 바치게 했다.

 

그러나 시전상인들이 갑을관계를 이용해 난전의 물건을 헐값에 사들여 독과점시장을 형성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난전상인들이 물건을 헐값에 팔지 않으면 시전상인들이 관청에 고발하는 바람에 상품유통 저해와 물가앙등을 초래한 것이다. 한마디로 시전상인들이 본업인 상업활동은 뒷전으로 하고 금난전권을 악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상품유통에 차질을 빚게 되었고 이는 그대로 민생의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정조 시기의 재상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상인의 왕래가 적고 저자가 한산해져 백성의 풍속과 살림이 곤궁해졌다” 며 금난전권의 폐단을 지적하고 독과점 상행위를 금지할 것을 주장했다.

 


시행과 영향

채제공은 금난전권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방안으로 최근 20~30년 이내에 전안(廛案)에 등록된 시전의 혁파와 육의전 이외 상인의 난전 단속 금지를 주장했다. 비교적 최근에 전안에 등록된 시전상인의 횡포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또한 육의전 이외의 상인들이 난전을 고발할 경우 반좌법을 적용해 오히려 고발자를 처벌할 것을 건의했다. 육의전의 금난전권을 존치시킨 데에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그들에게 계속 조달시킬 수밖에 없었던 재정상의 이유로 추정된다.

 

신해통공의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신해통공을 시행한 지 1개월 후 어물의 가격이 안정되었으며 5개월 후에는 장작 값이 내려갔다. 다산 정약용 역시 신해통공에 대해 “처음 1년 동안 백성들이 불편해 했으나 1년이 지난 지금 물품과 재화가 모이고 백성들의 소비가 풍족해져 다들 기뻐한다”고 평가했다.

 

신해통공으로 난전은 시전상인의 핍박에서 자유로워졌다. 또한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상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상업 활동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전상인의 독과점이 무너지면서 물가가 조정되었다. 물가가 조정되자 민간에 돈이 풀리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상업에 대한 투자를 이끄는 선순환으로 작용했다.

 

이런 환경을 바탕으로 경강상인과 같은 사상(私商)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경강상인은 한강 배다리 가설에 드는 비용을 부담하는 대신 세곡운송의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수원 화성 축조를 돕겠다며 비용을 보태겠다는 상인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제도개혁의 명분

금난전권은 본래 시전상인의 상업 활동을 보장하고 국가의 물품을 조달하는 것에 대한 보상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금난전권의 폐단으로 시전상인의 독과점이 강화되고 물가가 오르자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정조와 채제공은 신해통공의 명분으로 민생과 시장경제활성화를 내세웠다고 할 수있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그간 국가에서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했던 시전상인들의 반발이 제일 심했다. 또한 시전상인과 결탁한 관리들이 오랫동안 뿌리내린 제도를 바꾸는 것은 혼란을 초래할 뿐이라며 반대했다.

 

다산 정약용은“시장에서 세금을 거두는 일이 포도청의 군관들에게 맡겨지는데 이들이 상인들에게 부리는 횡포가 심하다”고 주장했다. 난전상인들은 관리들이 상인으로부터 쌀과 솜을 빼앗아도 아무런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우선 나라에서 난전을 금한 이유도 있었지만 고위관료와 결탁한 시전상인과 하급관리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전상인들은 난전을 단속하는 한성부, 사헌부 등 하급관리들과 결탁하고, 하급관리들은 다시 고위 관료와 결탁해 부정한 이익을 취했다. 따라서 부정부패척결 역시 신해통공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의의

신해통공은 어용상인의 특권을 축소·폐지하고 난전의 상업 활동에 편의를 제공한 조치로 오늘날에 대입하면 일종의 소상공인·중소기업 활성화 정책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새롭게 성장하는 상인세력을 정부가 공인하기 시작했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 상업발달로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늘었지만 기득권을 가진 시전상인은 금난전권을 통해 신흥 상업세력을 억누르고 상권을 독점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정에서 이러한 폐단을 진단하고 실정에 맞게 제도를 개선해 모순을 극복할 수 있었다. 민생과 부정부패척결, 건전한 상업 질서 확립에 대한 명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와 위정자들이 제도개선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기존 상인들과 이익당사자들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었다. 신해통공으로 봉건적 특권이 축소되고 이전보다 자유로운 시장경쟁이 이루어지면서 상업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1800년대를 전후해 사상들이 대중국 무역에서 더욱 활약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인류가 돌을 깨서 쓰다가 돌을 갈아서 쓰는 데만 수천 년이 걸렸다. 하지만 오늘날 2G 핸드폰에서 3G 스마트폰, 다시 3G에서 4G로 발전하는 데에는 불과 수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수년 만에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하루가 다르게 영업방식이 바뀌고 있다. 따라서 현행법이 앞으로 등장할 물류신기술과 새로운 영업방식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수년 전부터 언급되고 있는 택배법이나 최근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쿠팡 로켓배송에 관한 법 해석 논쟁이 단적인 예다. 현행법과 새로운 영업방식, 신기술 사이의 괴리에 신해통공의 교훈을 대입한다면 앞으로 더욱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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