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 대신 해체 택한 스타트업
규모(Scale) 위세 꺾이고, 속도(Speed)가 새 혁신의 도구로
글. 이종훈 국민대학교 글로벌창업벤처대학원 교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혁신’과 관련된 일이나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익숙한 용어일 것입니다. 최근에는 경제동향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도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슘페터(Joseph A. Schumpeter)가 주창한 창조적 파괴의 진짜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요 몇 년 대한민국 정치경제계가 목소리 높여 외쳤던 ‘창조경제’의 핵심 역시 창조적 파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경제에는 진정한 ‘창조’도, 기대했던 ‘파괴’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류업계에서는 어떨까요? 최근 물류업계는 ICT, 모바일, 유비쿼터스, IoT, 인공지능 기술의 엄청난 발전에 힘입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패러다임 변화(Paradigm Shift)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스타트업에게는 기회가 찾아올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번 글을 통해 스타트업이 왜 ‘창조적 파괴’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지, 또 2017년이 왜 스타트업을 통한 물류산업의 ‘창조적 파괴’가 이뤄지기 좋은 시기인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창조적 파괴, 기득권의 해체와 붕괴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마차로 가득했던 뉴욕의 거리가 불과 10여 년만에 자동차로 뒤덮여버린 천지개벽의 현장으로 말입니다. 그 대변화의 중심에는 두 명의 근현대 경제 영웅이 있습니다. 한 명은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이고, 다른 한 명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입니다.
▲ 1900년(아래)과 1913(위)의 뉴욕. 불과 10여 년 사이에 뉴욕 거리는 자동차로 뒤덮였다.
포드는 1903년 모델T의 생산을 시작으로 최초의 자동차 대량생산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슘페터는 1912년 그의 저서 ‘경제발전의 이론’을 통해 경제발전의 원인과 이론적 체계를 따져본 결과, ‘파괴적 혁신’의 중심에 포드와 같은 ‘기업가’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업가’와 ‘자본주의’의 부정적 현상(결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라고 하면 부정부패, 금권주의, 물질만능주의, ‘수저론’ 등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만 보면 정작 자본주의의 본질과 선순환을 위한 핵심은 놓쳐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슘페터가 말하는, 또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싶은,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변화와 혁신을 통해 경제적 기득권의 파괴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경제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경제발전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자본주의 경제는 정태적 일반균형 상태에서 순환적인 현상만을 보이며, 이는 앞서 우리가 언급한 ‘자본주의의 암울함’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슘페터의 말대로, 기존 경제체제의 균형을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혁신적 에너지의 원천에 '새로운 기업'과 '창업가(기업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드가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농장주들의 경제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동시에 엄청난 혁신을 통해 경제계의 새로운 지배자로 우뚝 솟아오른 것처럼요.
바로 이 지점에서 ‘창조적 파괴’와 ‘스타트업’을 연관시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조적 파괴란 창업가가 ‘새로운 조직’을 통해 기존의 경제적 균형(제품, 생산과정, 시장관행, 경쟁구조 등)을 깨고 새로운 경쟁체제와 부를 창출함으로써 시장을 끊임없이 순환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조직에 우리는 스타트업을 대응시켜볼 수 있습니다. 영어와 한문이 발달한 한국에서는 스타트업을 ‘Start-業’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창업이라는 의미를 절묘하게 나타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슘페터가 주장한 대로 창조적 파괴를 위해서는 다섯 가지 새로운 요소의 결합이 필요합니다. 그 요소를 하나하나 훑어보면 ‘창조적 파괴를 위한 다섯 가지 요소’가 ‘스타트업의 다섯 가지 본질’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스타트업이라는 ‘새로운 조직’은 ‘새로운 자원’과 ‘새로운 생산(또는 전달)’ 방식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열고 그 힘을 바탕으로 마침내 ‘새로운 경제적 기득세력’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표인 사례로는 새로운 검색 엔진을 통해 야후, 라이코스를 제치고 시장을 장악한 ‘구글’과 새로운 대화형 문자 서비스를 통해 SKT, KT, LG가 제공하는 SMS 시장을 파괴한 뒤 시장을 손에 넣은 국내기업 ‘카카오’ 등이 있을 것입니다.
스타트업의 키워드, 파괴 아닌 ‘언번들링’
파괴적 혁신을 말한 뒤에 곧바로 ‘구글’과 ‘카카오’를 예로 드는 바람에 혹자는 스타트업을 너무 멀게만 느낄 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누군가는 스타트업의 시작을 너무나 거창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우주비행의 목표를 달이 아닌 태양으로 잡는 우주개발자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앞서 예로 든 구글과 카카오 역시 처음부터 혁신적인 스타트업의 모습으로 등장해 지금의 거대기업 구조를 완성하고, 새 경쟁체제의 기득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새로운 조직(스타트업)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한 가지 아이템(구글-검색, 카카오-채팅)에 집중하여 기존 강자들의 사업군 중 하나를 잠식(Unbundling)했습니다. 그 후, 한정된 분야에서 쌓아올린 자신만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기업 구조를 이루고 그것을 원동력 삼아 주변을 추가로 장악(Re-bundling)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그들은 기존 시장의 거대 기득권을 몰아내고 더 견고한 새로운 경쟁구조를 구축했습니다. 스타트업이 처음부터 모든 기득 체제를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창조적 파괴의 시발점은 스타트업의 부분잠식, 즉 ‘언번들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16년 스타트업 관련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제로투원(Zero to One)’에서 피터 틸(Peter Thiel) 팰런티어 회장이 말하고자 했던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요컨대 ‘0 to 1’은 맨바닥에서 출발해 내가 1등할 수 있는 시장을 우선 찾아 그것을 완전히 잠식하고, 그 힘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케일은 죽었다, 이젠 속도다
다시 100년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이 1915년 발표한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물리적 세상의 에너지는 ‘질량’과 ‘속도의 제곱’에 비례합니다. 즉 높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질량보다 속도가 훨씬 중요합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옵시다. 현시점에 질량(Scale)이 의미하는 바는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기존에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규모’는, 그 규모가 만들어내는 ‘관성’ 때문에 오히려 혁신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오픈소스, ICT 신기술, 온디맨드, 밀레니얼 세대가 없던 시절에는 각각의 조직이 구현할 수 있는 실행 속도의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사업성공에 있어 중요한 것은 당연히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시장의 니즈를 파악한 뒤, 그것에 맞게 방향을 조정하고, 방향에 따라 조직과 자원을 확보하여 실행에 나서는 속도의 차이가 기업마다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시대입니다. 마침 다양한 채널을 통해 광속으로 정보를 습득, 재가공, 공유하는 신세대가 시장의 주 소비자로 자리 잡은 상황입니다. 요컨대 우리 눈앞에는 지금 ‘속도전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옆 나라 중국의 물류산업 발전 속도가 매섭습니다. 거대한 규모의 중국 물류산업이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는 것이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기업은 ‘속도’로 승부를 봐야 합니다. 창조적 파괴의 중심이 될 스타트업은 기억해야 합니다. ‘스케일은 죽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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