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온 속 정육·청과류 등 노출…불법운송 방치
[이코노미세계] #. 지난 9월 6일 오후 1시. 태풍 말로가 북상한다는 예보 속에 서울 금천구 일대 온도는 29℃를 가리켰다. 이곳 주변을 배송 중인 한 택배업체 직원의 허락을 받아 차량적재함 온도를 측정해봤다. 한우 등 정육세트와 과일이 실려 있던 그 곳의 실내온도는 30℃를 훨씬 넘겼다. 다른 몇몇 회사의 택배차량도 측정해 봤다. 36~38℃. 가만히 있어도 땀이 배어나올 정도의 수준이다.
추석을 앞두고 한우 등 정육·갈비 선물세트 등 냉장·냉동택배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운송과정 곳곳에 신선식품 관리의 허점이 드러나 소비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곳곳이 사각지대=식품의약안정청이 제시한 관리기준에 따르면 냉동식품은 -18℃ 이하, 냉장식품은 10℃ 이하를 유지한 상태에서 안전하게 운송돼야 한다. 그러나 택배로 배송되는 대부분의 정육세트는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반나절 동안 상온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냉장·냉동시설이 설치된 차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취재 중 만난 한 대형백화점의 계약차량(용차)은 아예 냉각기를 끄고 운행했다.
이 차량 운전자인 이 모 씨는 “냉동기를 켜 놓고 운행하면 평소보다 기름이 1.5배 더 탄다. 얼마 받지도 못하는데 한 푼이라도 아끼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인터넷쇼핑몰, 대형할인점 등 유통업체 대부분이 매년 최저 입찰과 운송료로 배송업체를 선정하다 보니 갈수록 박해지는 수익구조 때문에 벌어지는 운송업계 종사자들의 고육지책이라는 설명이다.
기름 값 아끼려고 냉각기 끄고 운행…운송료 현실화 시급 최저입찰 부추기는 백화점, 할인점 등 유통업체 책임 커 |
◆"오래된 관행 알면서도"=잘못된 관행인줄 알면서도 대목장사에 침묵하는 택배업체들도 가슴을 졸이고 있다.
업계는 차량(냉장·냉동)을 구하고 싶어도 신규 허가가 동결돼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항변이다.
택배사 한 관계자는 “증차를 하고 싶어도 정부가 막고 있는 상황이니 답답하다. 어찌 보면 정부가 운송업체들의 불법운송을 묵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일반 사업용화물차도 동결된 상태라 물량이 급증하는 추석 등 성수기에는 불법용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용차사용이 늘수록 본사의 운송관리 감독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토부 물류산업과 관계자는 “현재 사업용화물차(냉장·냉동차 포함) 신규허가가 동결돼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업체가 일반차량에 대한 구조변경과 대·폐차 신고를 통해 냉장·냉동차를 확대할 수 있음에도 비용증가(냉장냉동 설치비) 등을 이유로 미루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지난 2007년까지 냉장·냉동차량 등 일부 특수차량에 대해 신규허가를 내줬지만 시장 공급과잉과 불법개조 운행 등의 이유로 2008년부터 증차를 제한하고 있다.
◆"부처소관 아니다"=택배업체들의 불법 운송행위가 버젓이 이뤄지고 있음에도 행정당국은 뒷짐을 지고 있다. 식품안전 관리 소홀로 국민건강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국토부는 차량이 아닌 화물에 대한 관리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식약청은 관리 단속에 나설 인력 부족 등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나마 2년 전 서울시가 설 연휴를 앞두고 민·관 합동으로 일부 불법행위(냉장·냉동식품 혼재, 적정온도유지, 시설미비차량 등)를 단속한 정도다.
식약청 관계자는 “지난달 31일 16개 시·도에 관련공문을 보내 추석 명절을 맞아 이달 10일까지 냉장·냉동식품의 유통실태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 중에 있다”며 “단속에 앞서 대형 택배사들이 식품안전 불감증과 오래된 관행을 고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그 동안 대형 유통업체들은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며 “온라인 유통시장 활성화에 따른 택배 이용증가로 향후 관리대책을 심도있게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올 추석 선물로 청과류 판매가 줄고, 반면 한우 등 정육·갈비와 같은 냉장·냉동 선물세트가 인기다. 유통업계는 봄 냉해와 태풍 피해로 인한 품질 저하와 가격 급등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이들 업계는 청과류 대체상품으로 냉장·냉동 선물제품이 각광을 받으면서 판매량이 전년대비 20~40%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냉장·냉동배송이 증가하고 있는 이 때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는 사각지대는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
김철민 기자 olle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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