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엄지용 기자
정말 물류창업이 늘고 있나요?
물류스타트업의 수가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국토교통부가 한국교통연구원의 연구를 인용하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 40개에 불과하던 물류스타트업이 지난 1월 기준 80개로 늘었다. 또한 한국교통연구원 물류연구본부의 최신 연구 결과(한국교통연구원은 구글 문서를 통해 물류스타트업 기업 목록을 외부에 공개, 수시로 업데이트 하고 있다.)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국내 물류스타트업의 수는 98개로 3개월 사이 18개가 더 늘었다.
하지만 위 조사에 실제로 ‘물류’ 창업기업이 많은 것은 아니다. 한국교통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98개의 물류스타트업 중 B2B 영역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18개에 불과하며, 그 중 물류업종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만 추리면 그 수는 더욱 줄어든다. 왜일까? 이는 한국교통연구원이 정의한 ‘물류스타트업’에 전통적인 물류업종뿐 아니라 물류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종산업 업체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복수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국내 B2B 기업물류 창업이 늘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로 추려진다. 첫째, ‘폐쇄성이 만드는 진입장벽’ 때문이다. 대중의 눈에 쉽게 보이는 O2O, B2C, C2C 물류와 달리 기업 간 거래가 중심이 되는 기업물류는 관계자가 아니면 쉽게 들여다 볼 수 없다. 즉 현업에서 경험을 쌓은 관계자가 아니면 기업물류 현장의 문제점을 면밀히 파악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창업으로 이어지는 숫자도 적을 수밖에 없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CJ대한통운이 집중하는 물류 영역 중 하나인 W&D(Warehouse & Distribution)는 스타트업이 접근하기 어려운 시장”이라며 “현장 경험과 산업 특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센터 내부에서 발생하는 여러 이슈에 대한 개선점을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둘째는 ‘물량 확보의 어려움’ 때문이다. 물류업은 매출을 내기 위해 필수적으로 영업을 통한 물량 확보를 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디어만 가지고 창업한 스타트업이 유의미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많은 물량을 보유한 대화주부터, 계열사 물류기업(2PL), 중소 물류기업까지 하청에 재하청으로 꼬리를 무는 국내 물류환경에서는 그 어려움이 더하다. 유의미한 물량은 이미 누군가의 관계망 안에서 돌고 있다. 삼성그룹의 삼성SDS,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글로비스, LG그룹의 LG상사(판토스), CJ그룹의 CJ대한통운, 롯데그룹의 롯데글로벌로지스, 한화그룹의 한익스프레스 등…. 더 말하면 입만 아프다.
국내 한 3PL 업체 대표는 “학계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는 3PL 모델은 국내에선 절대 성공할 수 없다”며 “모회사 물량을 바탕으로 급격히 성장한 2PL 기업이 물량을 독식하는 상황에서 중소물류업체는 그들에 기생하여 살 수밖에 없는 구조”라 밝혔다.
눈부신 성공, 단지 운 때문일까
그런데 이 쉽지 않은 기업물류 환경 속에서, ‘B2B 기업물류’에 ‘글로벌’까지 더해 창업에 나선 업체가 하나 있다. 바로 CJ대한통운 글로벌본부장 출신의 허욱 대표가 15년 6월 설립한 IT설비 전문 물류업체 ‘에이치앤피로지스’다. 이 업체의 핵심은 ‘물류업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라 한다. 본질이라. 애매하다. 물류업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백지 상태로 시작해 물류업의 본질에 집중했다는 에이치앤피로지스가 창업 2년 만에 이뤄낸 성과는 굉장하다. 에이치앤피로지스는 지난달 기준 S사, L사 등 핵심화주 5개사, 대형화주 10개사, 일반화주 40~50개사의 물량을 처리하는 업체가 됐다. 처음 베트남 네트워크 하나로 시작한 사업은 홍콩, 중국, 일본까지 확장됐다. 사업 초기 8명(현장 계약직 약 40명)에 불과했던 직원도 40명(현장 계약직 약 200명)으로 늘었다.(2017년 5월 기준) 에이치앤피로지스는 지난해 약 40만 CBM(약 2만 TEU)의 물량을 처리하며 원래 계획했던 목표의 300%를 초과하는 성장을 달성했다고 설명한다.
허욱 에이치앤피로지스 대표는 회사의 빠른 성장을 ‘운’ 때문이라고 한다. 사업 초기 어찌어찌 S사의 중국 프로젝트를 전담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그 경험이 레퍼런스가 되어 연이어 대형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S사의 물량을 따낸 것이 순전히 운 때문이었을까? 혹시 허 대표가 너무 겸손한 것은 아닐까?
“물류란 주류(酒流)요, 인류(人流)로다”
허 대표의 겸손함 뒤에 무언가 큰 그림이 감춰져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물류의 본질’을 파악해야 했다. 허 대표는 물류의 본질을 ‘포장에 매몰되지 않고 업에 집중하는 것’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험 및 네트워크’라고 이야기한다. 허 대표가 지난 수십 년간 쌓은 물류 경험과, 현장에서 만난 관련 협력업체, 동중 물류업계 관계자를 잇는 네트워크가 어느 순간 하나로 이어지면서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물류의 본질이라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한국말로는 인맥이라고도 하는 네트워크. 그런데 이게 물류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다. 오죽하면 “물류는 주류(酒流)요 인류(人流)”라는 말이 업계에 유행처럼 번졌겠는가. 어떤 기업이라도 전 세계를 연결하는 물류를 혼자 처리할 수 없다. 따라서 물류업 종사자에게는 소위 한 동네 ‘물류대장’을 찾아 연결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유럽 네트워크가 비교적 약한 페덱스가 TNT를 인수하고, 지난해 동남아 공략을 선포한 삼성SDS가 현지 업체와 합작법인부터 설립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허 대표는 물류업에 열심히 집중하다보니 어느 순간 네트워크가 연결돼 큰 힘이 됐다고 한다. 그는 “평소 자신의 강점이라 생각하는 것을 분석하고 이해한 뒤,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면 어느 순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타이밍이 오게 된다”며 “물론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어느 순간 공기처럼 흩어져 있던 네트워크나 관계가 이어지는 때가 있는데, 그러자 오래 고민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되더라”고 말했다.
음, 좋다. 그런데 아직도 조금 애매하다. 물류의 본질에 도달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S사가 과거 형성한 관계 하나만 믿고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스타트업에 물량을 맡길 리가 없지 않은가.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에이치앤피로지스가 말하는 진정한 물류의 본질일 것이다.
IT설비 전문 물류업체가 되기 위해
사실 에이치앤피로지스는 사업 초 ‘레퍼런스’ 부족으로 인해 문제를 겪었다. 허 대표에 따르면, 회사 레퍼런스가 없다보니 재무조달부터 신규고객 유치까지, 시장진입에 장애가 되는 요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에이치앤피로지스가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것이 있었다. 하나는 ‘하드웨어 인프라에 대한 투자’이고, 둘은 ‘일관운송체계’ 마련이다.
사실 이 둘은 하나와 마찬가지다. 에이치앤피로지스가 ‘IT설비 전문 물류’를 만들기 위해 둘은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에이치앤피로지스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했다. 물론 그냥 전문가가 아니라,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경쟁업체에 비해 더 경쟁력 있는 전문가가 돼야 했다. 그래야 신생기업으로서 S사와 같은 우량화주에게 무언가 내세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우선 에이치앤피로지스가 취급하는 IT설비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IT설비는 주로 반도체, LCD, OLED, 태양광, 메디컬 헬스케어 등의 ‘정밀기기 설비’를 일컫는다. IT설비는 충격과 진동 등에 민감하여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가령 반도체는 진동, 온·습도에 민감할 뿐 아니라, 작은 먼지에도 손상될 수 있어 철저한 청결 관리가 필수적이다. 당연히 일반 컨테이너 운송으로는 품질이 유지될 수 없다. 특수 장비가 필요한 까닭이다.
에이치앤피로지스에 따르면, 지난 1년 사이 창업 자본금 14억 원이 240억 원으로 늘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인프라’ 투자로 인한 것이다. 실제로 에이치앤피로지스는 천안에 10,408㎡(약 3,148평) 규모의 물류센터를 확보했다. 그냥 물류센터가 아니다. 내부에 정밀기기 운송, 설비 해체/조립, 반출/반입을 위한 포장·운송장비 및 기자재를 갖춘 물류센터다.
에이치앤피로지스가 하드웨어에 갖는 애착은 그들의 회사소개서를 보면 더 잘 드러난다. 두 장짜리 별첨 슬라이드의 ‘정밀기기 전용 장비 및 공구’ 항목에는 크레인, 포크 리프트, 반입용 컨테이너 및 곤도라, 에어캐스터, 트롤리, 트레일러, 트랙터, 항온항습 컨테이너, 클린룸(Clean Room) 전용 작업장비 등의 사진이 실려 있다.
허 대표는 “최근 국내 최초로 55톤 지게차를 도입했다”며 하드웨어 인프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에이치앤피로지스는 가격이 비싸 직접 구매하지는 않았지만, 전용선박(Ro/Ro Vessel) 역시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 에이치피로지스가 얼마 전 도입한 55톤 지게차
국경을 넘는 ‘원스탑’ 일관운송
에이치앤피로지스는 이렇게 투자한 하드웨어 인프라를 바탕으로 국경을 뛰어넘는 ‘수직일관운송’ 체계를 만들었다. 수직일관운송이란 에이치앤피로지스가 직접 구축한 네트워크를 통해 출발지부터 도착지까지, 보관, 포워딩, 운송, 포장, 통관을 망라한 모든 물류 프로세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고객은 제조업체부터 목적지 공장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물류 서비스(One-stop)’를 이용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국가 간 물류에서 발생하는 규제 및 통관 이슈가 한 번에 해결됨은 물론이다.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많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치앤피로지스만의 강점이 있으니 바로 ‘수직일관’이다. 에이치앤피로지스에 따르면, 에이치앤피로지스처럼 한 회사가 물류 전 프로세스를 수칙 체계로 묶어 제공하는 경우는 전 세계를 놓고 봐도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은 각각의 운송회사, 포장회사, 포워딩회사 등을 연결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허 대표는 “운송 품질 관리를 위해 수직일관운송 체계를 구축한 것이 에이치앤피로지스의 경쟁력”이라며 “수직일관운송 체계를 통해 확보한 품질 및 원가는 부분적인 조합 방식을 사용하는 경쟁사와의 차별점이 된다”고 말했다.
전문성과 차별성을 바탕으로
에이치앤피로지스는 2020년까지 매출 5,000억 원을 달성하고, 글로벌 1위 IT설비 전문 물류업체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에이치앤피로지스는 현재 일본의 한 업체(허 대표에 따르면 이 회사는 과거 허 대표가 일본 법인장으로 있으며 인큐베이팅했던 회사다.)가 관련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중국계 회사는 ‘직접 물류’를 하지 않아 에이치앤피로지스가 집중하는 영역과 다르기 때문에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고 설명한다.
물론 매출만 놓고 보면 국내에도 에이치앤피로지스를 뛰어넘는 물류 대기업이 많다. 그러나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허 대표의 설명이다. CJ대한통운과 같은 대기업은 기계, 조선, 화학, 섬유 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물류업체’이고, 에이치앤피로지스는 ‘IT설비’ 하나에만 집중하여 관련 영역을 점차 넓혀나가는 회사이기 때문에 전략과 분야가 다르다는 것이다.
허 대표는 “소기업은 전문성과 차별성을 가지고 물류시장에 진입해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며 “여기에 업에 대한 창업자의 확고한 신념 및 이해, 도전 정신이 더해져야 한다. 그리고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면 언젠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의 모멘텀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전했다.
IT설비 전문물류라는 ‘전문성’, 수직일관운송이라는 ‘차별성’을 가지고 물류시장에 뛰어든 에이치앤피로지스는 서서히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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