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송영조 기자
Idea in Brief
지난 9월 11일, 엡손에서 에픽(EPIC; EPSON Insight Communication) 컨퍼런스를 열었다. 컨퍼런스의 슬로건은 ‘물류 효율의 향상은 엡손의 디테일로부터’ 였다. 엡손에서 물류라니, 행사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의아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물류 산업 분야의 최근 이슈와 발전 방향에 대한 강연 이후 물류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엡손의 IT 솔루션이 소개됐다. 프린트 팔던 엡손은 왜 물류에 주목하는 것일까. 단순한 호기심이 이 글의 시작이다.
프린터 이전에 ‘디테일’
많은 사람들이 엡손이라는 브랜드를 이야기하면 프린터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엡손에서 물류에 주목한다’는 말이 피부로 와닿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엡손은 프린터를 만들기 전에 손목시계 제작으로 출범한 회사다. 엡손은 다름 아닌 세이코 시계를 만들었다. 우리가 아는 그 일본제 세이코 시계 말이다.
“처음에는 사명도 ‘세이코 엡손 코퍼레이션’이었다” 한국엡손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 김대연 팀장의 말이다. 그는 “시계 제작에는 초정밀기술이 필요했고, 오랜 시간 시계를 만들면서 기술력을 축적했다. 시계를 제조하는 동안 남긴 기록을 출력하고 싶은 의지가 있어서 프린터를 만들게 되었고, 프린터를 만들다가 디지털 시계까지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다.
정밀기술에 대한 엡손의 집착은 지속적인 신산업 진출로 이어졌다. 프린터 헤드를 만드는 데도 초정밀기술이 필요했고, 디지털 시계에 들어가는 LCD 또한 마찬가지였다는 게 김 팀장의 설명이다. 엡손은 이렇게 기술 적용 범위를 넓혀가다 보니 LCD 프로젝터 비즈니스까지 영역이 확장되었고, 마이크로디스플레이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스마트 글라스 산업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구글 글라스 ‘No’ 스마트 글라스라 불러다오
엡손은 물류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산업으로 스마트 글라스를 꼽는다. 김 팀장은 “아직까지는 여전히 산업용보다는 소비자 시장에 대한 수요가 압도적으로 많다”며 “하지만 향후 시장을 전망해보면 산업용 스마트 글라스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원래 스마트 글라스 시장을 기획한 것도 산업 현장에 적용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제조 또한 그쪽 방향으로 집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는 최소 절반 이상의 스마트 글라스가 B2C 시장을 통해 드론 마켓에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100중 55가 개인 소비자에게, 45가 산업용으로 쓰인다는 게 김 팀장의 설명이다.
산업용 스마트 글라스라고 하면 정확히 어떤 분야에 적용되는 것일까. 답은 ‘리모트 어시스턴스(remote-assistance)에 있었다. 주니어 레벨의 근로자가 현장에서 작업할 때 시니어 레벨의 인력이 본부의 모니터를 보고 작업을 지시한다. 가령 현장 인력에게 ’오른쪽에 보이는 볼트를 풀어라‘고 지시하려면 본부 모니터에 해당 부분을 마킹하면 현장 인력의 스마트 글라스를 통해 전달되는 구조다. 원격에서 모니터 화면으로 작업 지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엡손 관계자는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기술이 스마트 글라스 기술을 실현하게 만든 주역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LCD 기반의 디스플레이 기술을 채택한 것인데, 패널이 엄지손가락의 손톱만 하다.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기술은 이 패널을 만드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실리콘 OLED 기술을 스마트 글라스에 탑재하게 된 것이다. LCD 패널에는 손톱만 한 패널이 세 장 들어가는데, 여기에 RGB를 투과시켜서 고품질의 영상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국내 유통업체와 물류 창고를 대상으로 스마트 글라스의 현장 테스트가 진행중이라는 게 한국엡손 측의 설명이다. 회사 관계자는 “아직 POC(개념증명, Proof of Concept) 단계이기는 하지만 여러 회사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고, 앞으로도 도입 시도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답했다.
▲ 한국엡손은 2020년 무렵을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기점이라고 봤다.
효용성에 대한 의문
스마트 글라스로 작업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게 개발사의 입장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먼저 하드웨어 도입 비용보다 하드웨어를 구현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비용이 비싸서 현장 도입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견이 있다. 엡손 측에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엡손 관계자는 “기업마다 현장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기능이 천차만별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 기업들과 SI업체들 간의 연결을 주선하고 있다”며 “SI업체가 기업들의 필요사항이 적절하게 반영된 커스텀 소프트웨어 개발을 회사에 유도하거나 직접 개발까지 맡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현장의 고민을 엡손 측도 인지하고 있었다. 같은 관계자는 “이때 각 기업이 개발비용을 부담해야 하므로 개발 효과가 명확하게 예측되지 않으면 개발을 주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책적으로 제품을 테스트하고 개발하고 있는 기업들이 지금도 여럿 있다”고 밝혔다. 한국엡손 측은 세부적인 기업명 공개는 어렵지만,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비롯한 여러 회사에서 현재 테스트를 진행 중이라고 귓뜸했다. .
배터리와 작업자의 사용 문제도 있다. 배터리 사용 시간이 너무 짧아서 지속성이 떨어지거나, 스마트 글라스 착용과 함께 양손이 자유로워지면서 작업이 편리해졌지만, 스마트 글라스의 디스플레이를 통해 마킹을 확인하는 동시에 실물을 보면서 작업하는 데 불편함이 있다는 현장의 불만이 나온다. 심지어 작업자의 안전 문제까지 발생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보이스 피킹의 경우 잦은 기기 사용으로 인해 현장 인력에 이명이 발생하기도 한다는 게 국내 한 대형 제조업체 관계자의 전언이다. 스마트 글라스도 마찬가지로 작업자의 눈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게 업계의 궁금증으로 꼽혔다.
한국엡손 측에서는 이러한 지적 사항 또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봤다. 한국엡손 관계자는 “스마트 글라스 배터리의 경우 스마트폰과 유사한 2,950mAh 용량의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사의 제품 대비 오랜 시간 제품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작업자의 눈 건강에 대해서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같은 관계자는 “1세대 스마트 글라스 출시 이후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일반 2D, 3D TV와 비교 실험을 해봤다. 동일시간, 동일조건에서 각 디스플레이를 시청했을 때 시청자의 눈 피로도에 대해 연구를 진행했으며, 스마트 글라스를 착용했을 때 2D TV를 시청할 때보다 피로도가 가중되는 것은 맞지만 3D TV를 시청할 때보다는 낮았고, 그 차이가 크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두 번째 접목, 산업용 로봇 솔루션
엡손이 물류현장에 접목하려는 두 번째 시도는 산업용 로봇 솔루션이다. 지금도 제조 공장에서 산업용 로봇이 활약하고 있지만, 엡손은 특히 자동차와 전자 제품 제조 산업의 물류 공정에서 제품을 선별하고 피킹해서 포장 박스에 넣는 작업, 포장된 박스에 라벨을 부착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의 업무를 담당하는 로봇 솔루션에 집중한다.
한국엡손 김대연 팀장은 “결국 산업용 로봇 솔루션은 공장 자동화와 결을 함께 하는데, 로봇은 크게 대형과 소형 로봇으로 나뉜다. 엡손에서 만드는 산업용 로봇은 자동차 문을 들거나 용접하는 대형 로봇이 아니고, 간단한 피킹과 프레싱이 가능한 스칼라 로봇이 주력 상품이다”면서 “지금은 소형 로봇 솔루션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6관절 스칼라 로봇의 경우 최대 8kg 중량까지 들어 올릴 수 있는데, 글로벌 시장 기준 엡손이 3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김 팀장의 설명이다.
단순한 로봇 제조에도 기술력이 필요하다. 김 팀장은 로봇이 제 기능을 하려면 정밀도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로봇이 피킹할 때 물건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엄한 곳에 놓아 버리면 사고가 발생한다. 정확한 피킹을 하려면 먼저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고, 이를 구현하려면 비전 테크놀로지가 필요하다”라며 “경쟁 업체들은 비전 테크놀로지 기술을 자체 보유하고 있지 않고 아웃소싱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비전 테크놀로지는 물론이고 힘의 강약 조절 기능을 담당하는 포스 센서 또한 자체 기술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경쟁 업체 대비 가장 큰 차별화 지점이라고 김 팀장은 내다봤다.
상용화 시기는 언제쯤
한국엡손 측에 따르면 현재 스마트 글라스와 산업용 로봇 솔루션의 매출액 비중은 전체의 3~4%에 불과하다. 엡손은 두 시장의 대중화 시기를 언제쯤으로 보고 있을까.
김대연 팀장은 “작년부터 이 시장에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2020년 정도가 되면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는 시장이라고 전망하고 있다”면서 “이는 비단 한국 시장뿐만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연구 결과만 기반으로 예상한 것은 아니고, 현재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감안했을 때 2020년이 되면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쟁사는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팀장은 “스마트 글라스의 경우 글로벌 시장까지 보면 뷰직스(Vuzix)라는 곳이 있다. 구글 글라스처럼 한쪽 눈앞에만 디스플레이가 있는 장비를 만드는 미국을 기반으로 한 회사다. 구글 또한 ’엔터프라이즈 에디션‘이라고 해서 일반 소비자 대상이 아닌 기업을 타겟팅하고 있는 관련 사업을 진행 중이다”라고 밝혔다. 그 외에도 몇 곳이 더 있지만, 해당 회사들이 한국으로 진출하지 않아서 현재 엡손이 유일한 시장 참여자라는 설명이다.
▲ 지난 9월 11일 엡손에서 주최한 에픽 컨퍼런스에서 한국엡손 시부사와 야스오 대표가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3D 프린터는 ‘글쎄’…엡손이 그리는 미래
김대연 팀장은 앞으로 스마트 글라스와 로봇이 한국엡손의 메인 포트폴리오가 될 것이며, B2B 시장을 공략하는 판이 짜일 것이라고 봤다. 그는 “산업용 로봇의 경우 지난해 성장률이 2016년 대비 375%나 올랐고, 스마트 글라스 또한 해마다 성장하고 있다”며 “또한 모든 비즈니스 포트폴리오가 개인 고객보다 비즈니스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실제 포트폴리오 중 B2B 관련 매출 비중이 77%에 달한다는 게 엡손 측의 답변이다.
엡손이 수십 년 동안 프린터를 만들어온 회사인 만큼, 3D 프린터 시장 진입에 대한 계획은 없는지 궁금했다. 김 팀장은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기술력은 보유하고 있지만, 시장을 밝게 전망하고 있지는 않다”며 “아직까지는 시장 성장 속도가 느리고, 쉽게 물건을 복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라이센스 문제가 대두될 가능성도 높아 선결되어야 할 이슈가 많다”고 답했다. 저작권 문제로 당장 시장이 본격화되기는 다소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예의주시만 하는 상황이라는 게 김 팀장의 설명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이 기존 산업에 어떻게 가치를 더할 수 있는지 소개하고 논의하기 위해 에픽 컨퍼런스를 열었다는 한국엡손은 물류뿐만 아니라 교육, 광고산업에도 발을 들이고 있다. 신산업 시장이 본격화한다고 전망한 2020년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2년 남짓, 산업용 글라스와 산업용 로봇 솔루션으로 시계, 프린터를 넘어 또 한 번의 도약을 꿈꾸는 엡손의 행방에 귀추가 주목된다.
사족이지만, 행사 당일 엡손이 선보인 프린터 등 다양한 제품군을 직접 확인하면서 현재의기술 만으로도 생산물류 현장에서 라벨, 포장 등의 혁신의 여지는 충분히 엿보였다는 건 기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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