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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시티 사태로 엿 본 대한민국 물류정책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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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 2012. 7. 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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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의 화물터미널 부지가 교통체증 등으로 그 기능을 거의 상실해 가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양재동 구 화물터미널 부지가 아직도 화물터미널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지냐, 아니냐가 중요한 논쟁은 아니다. 다만 수십년 동안 물류업계가 정 붙이고 사업을 하던 땅 마저도 개발논리에 밀려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대체부지도 찾지 못할 만큼 이 땅에 물류를 위해 먼지 한 톨만큼의 배려와 정책이 없다는 게 슬픈 현실이다.


글. 후버 인터넷 물류논객


웅장하고 신명나는 배경음악 사이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석양 속에 짐을 실은 화물트럭들이 바쁘게 달리는 모습을 실루엣으로 비춰진다. 그리고 멋진 성우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한국경제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어쩌구~ 힘내라 대한민국 경제, 저쩌구~ 한국인의 저력을 믿습니다, 이러쿵~ 대한민국은 할 수 있습니다, 저러쿵~." 


 
예측 가능한 뻔한 감동을 제공하는 일부 광고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 흘러나온다. OK 거기까지!


 
내레이션 컷. 세트장을 치운다. 더 이상 실루엣을 만들어주던 조명발도 없다. 그리고 화면에 비춰지던 화물트럭들은 현실로 되돌아온다.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흔한 직업이 된 화물트럭 기사의 고단한 삶 그 자체다. 오르는 기름가격과 비싸지는 차량 가격, 그리고 물류비 인하로 점점 현실과 멀어지는 운송비.  


 
그 와중에 나온 양재동 구 화물터미널 부지 재개발 사업 관련 소식들은 아마도 화물트럭기사들과 그들과 공생하는 이들을 낙담하게 하고도 남을 일이었던 사건이었다. 


 
도심에 위치한 화물 터미널이라는 것은 전국에서 올라온 화물들을 집하하여 소분하고 수요자에게 배달하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물류시설이다. 따라서 도심에 위치한 화물 터미널을 만들려면 대형 화물트럭이 주차할 수 있는 공간과 소형 화물트럭이 주차할 수 있는 공간, 이 두 개가 전부 필요하다.

 

그런데 막상 화물터미널 부지 재개발 과정에서 모든 주차공간은 승용차용으로 디자인 되었으며, 트럭을 위한 주차공간은 200대 남짓이었다. 그것도 과거 양재동 화물터미널이 대형 화물트럭 주차 공간 600여대 분량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보다 대수가 줄어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확보한 공간마저도 대형 화물트럭이 아니라 최대 5톤 트럭밖에는 세울 수 없는 면적이라고 한다. 


 
5톤 트럭 200여대. 이건 그야말로 소꿉놀이 수준이다. 팔레트 기준으로 14×200대=2800팔레트. 팔레트당 CBM을 1.5 CBM으로 잡으면 4200CBM이다. 4200CBM이면 양재동 구 화물터미널 부지 9만6000평방미터 중 1/10만 있어도 다 채우는 수준이다. 


 
이 정도면 이건 화물터미널 재개발이 아니다. 아마도 양재동 화물터미널 부지 재개발 계획을 짠 사람들이 양재동 화물터미널을 이사짐센터 허브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포장이사 차량의 표준 사이즈가 5톤 트럭 아니던가? 그게 아니라면 백화점 물류센터라도 지을 생각이었나 보다. 화물터미널 부지 재개발 사업에는 백화점이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위치할 화물트럭 주차장은 결론적으로 서울 남부권 전역을 커버하는 화물터미널 기능이 아니라, 그 백화점의 물류센터 기능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셈이다. 그런데 말이지, 이것도 잘못 계산한 것이다.

 

요즘 유통업체 중에 5톤 트럭을 배송용 화물차로 사용하는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모두들 배송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11톤 이상의 윙바디 트럭을 운영한다. 이사짐센터 허브도, 백화점 시설의 물류센터 목적도 아니라면 200대의 화물트럭 주차장 공간은 마치 웨스틴조선호텔 뒷마당에 있는 대한제국의 유물 '원구단' 만큼이나 들러리 역할만 하는 셈이다. 아니면 백화점에 쏟아져 들어올 외국산 승용차와 화물터미널의 화물차가 서로 같은 길을 달린다면, 화물차와 승용차 운전자들은 어디 불안해서 운전하겠는가?


 
한마디로 화물터미널 기능을 살리는 것을 전제로 화물터미널 부지를 재개발하면서 화물터미널 기능은 사실상 없어진 셈이다. 김포공항에 할인점과 쇼핑몰을 유치한 것은 그나마 봐줄 만하다. 김포공항은 여객운송이 화물운송보다 규모가 컸고, 그들을 유치하고 지역주민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쇼핑몰을 크게 가져갔다. 실제 여객이 이용하는 공항을 쇼핑몰로 만드는 일은 여행 편의 차원에서도 권장할 만하다. 그렇다면 화물터미널과 쇼핑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왕 이렇게 될 일이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이곳을 소비시설로 만들어 버리고 소신껏 서울 남부권의 대체 화물터미널 부지라도 확보하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장기임대 방식으로 시행사가 부지매입비용 부담 없이 개발 후 이익을 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정녕 없었던 것일까?

 

생각해보자. 물류가 어떤 업종인데 비싼 부지매입비용을 부담하면서 화물운송으로 수익을 낼 수 있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부지를 비싸게 매입했다는 것만으로 이미 양재동 구 화물터미널 부지의 화물터미널로써의 기능은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나 다를 게 없다. 파이시티라는 이름 자체가 너무나 가증스럽다. 파이, 원주율을 표시하는 그리스어다. 돌아가는 바퀴처럼 원을 표시하는 파이를 프로젝트 이름으로 만들어 놓고 정작 바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백화점과 오피스텔이 프로젝트에 들어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가증스러움의 극치라 할 수 있겠다. 


 
도심의 화물터미널 부지가 교통체증 등으로 그 기능을 거의 상실해 가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양재동 구 화물터미널 부지가 아직도 화물터미널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지냐, 아니냐에 대해서 필자는 관심이 없다. 다만 필자가 관심 있는 것은 수십년 동안 물류업계가 정 붙이고 사업을 하던 땅 마저도 개발논리에 밀려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대체부지도 찾지 못할 만큼 이 땅에 물류를 위해 먼지 한 톨만큼의 배려도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슬픈 현실이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동북아 물류 허브의 '동' 자도 꺼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휴식공간도 마땅치 않은 양재동 구 화물터미널에서 때로는 자판가 커피 한잔에 무료함을 달래고, 때로는 의자를 붙이고 누워 새우잠을 붙이면서 화물을 받아 남쪽으로, 남쪽으로 운전하던, 그리고 그 어딘가에서 짐을 내리고 다시 화물을 받아 서울로 배송하고 도로 양재동 구 화물터미널에 돌아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전국의 수많은 화물트럭 기사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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