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판 상납(?)'에 뿔난 화물차주
직접운송의무제 앞두고 물류사 불공정행위 빈발
[이코노미세계] #1. 화물차주 최기정 씨(58세, 가명)는 차량을 지입 중인 운송사로부터 직영차량 전환을 제안 받았다. 본사와 직거래하면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다지만 최 씨의 결정은 쉽지 않다. 자신의 차량 소유권을 회사에 양도하면 되는데 현행 화물운송시장 구조와 근로기준법을 감안하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2. 대기업 물류자회사 협력운송사 사장인 김효철 씨(41세, 가명)는 며칠전 영업사원으로부터 물량과 운임을 인상해 줄 테니 보유 중인 영업용 번호판을 일부 넘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김 사장은 거래처의 요구를 거절하면 불이익이 생길까 싶어 '울며 겨자 먹기'로 떼어줄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영세 화물차주 재산권이 위협받고 있다. 국내 화물운송시장에 '직접운송 의무제' 도입을 앞두고 대기업 물류자회사와 협력운송사 간 불공정 행위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운송 의무제란 운송사가 수탁화물의 일정 비율 이상을 자기차량으로 운송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위반 운송업체는 사업허가 취소 등 처벌이 따른다.
이 때문에 자차 비중이 낮은 대기업 물류자회사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신규증차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화물차를 구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업계에 따르면 물류자회사가 이런 이유로 물량과 운임인상을 미끼로 영세 협력운송사와 차주에게 번호판 상납(?)을 공공연하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부산, 인천, 울산, 충남, 경남 등 화물 물동량이 집중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대표적인 사례로 대기업 물류자회사 중 G사, P사, D사, C사, H사 등을 꼽았다.
정부가 화물운송시장의 선진화를 위해 마련한 '직접운송 의무제'가 22일 임시국회에 재상정된다.
업계는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이하 화운법) 일부개정안의 통과여부에 대해 '미지수'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주무부처인 국토해양부는 오는 9월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어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상생은커녕 상도의는 지켜야"= 직접운송 의무제 도입을 앞두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은커녕 저질 상도의(常道義)란 지적이 일고 있다.
중소운송업체 한 관계자는 "물량을 쥐고 있는 거래처(물류자회사)로부터 영업용 번호판을 팔지 않으면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현행 거래시세에도 못 미치는 가격을 제시하는 수준"이라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헐값이라도 가격을 쳐주는 곳은 그나마 양심이 있는 회사"라며 "물량과 운임인상을 이유로 번호판을 상납하라는 사례도 있다"고 억울한 심경을 밝혔다.
자체 물량 확보가 불가능한 영세운송사와 화물차주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 화물차주는 "향후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고 싶으면 번호판을 양도하라는 전화를 받았다"며 "야간운행이 많은 화물운송업은 노동기본법상 요건을 충족할 수 없는 실정인데 회사가 어디까지 보장해줄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신규증차 제한 속 대안 없어 = 물류자회사도 속 타는 건 마찬가지다. 신규증차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차 비중을 높이기 위한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업체 한 관계자는 "번호판 상납이란 협력운송사의 주장은 옳지 않다"며 "직접운송 의무제 도입의 취지를 함께 살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을 위한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지입 화물차주에게 직영 전환을 유도해 안정된 고용보장을 제공하고, 협력운송사와 계약관계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입장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법제화(직접운송 의무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회사가 나설 이유가 없다"며 "관련 법 시행 이후 문제여부를 확인해 보겠다"고 말했다. 회사의 번호판 양도 요구가 별 다른 문제가 없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 관계자는 "자차의 일정 보유비율을 의무화하여 시장 내 비적격 주선업체의 무분별한 다단계거래 등을 방지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국내 화물운송시장의 발전을 위한 과도기적 시점에서 나온 고육지책이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실제로 현행 영업용 화물차의 번호판이 차량의 크키와 지역에 따라 최소 700만원에서 3000만원(컨테이너) 이상을 호가하고 있는 점은 물류자회사에게도 큰 부담스런 요인으로 보인다.
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영업용 화물차 번호판이 금값"이라며 "직접운송의무제를 앞두고 값이 더 올라 시장상황을 악화(번호판 상납)시키는 요인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수탁비중 20% 미만, 택배 제외 = 국토부는 업계의 이 같은 고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응이다.
국토부 물류산업과 관계자는 "몇몇 대형물류자회사와 운송사(차주) 간 불합리한 번호판 양도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나 현재까지 발생건수가 적고, 전체 화물운송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국토부에서 업계의 거래행위에 대해 권고조치를 내릴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며 "개정법안 통과 후 세부시행령과 규칙을 보완해 업계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국토부는 직접운송 의무제 도입과 관련 업계 의견을 반영해 애초 수탁 비중을 30%에서 20%로 하향 조정하고, 택배 차량의 경우 직접운송 의무제에서 제외할 것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철민 기자 olle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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