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스템과 규칙보다 ‘인간’이 먼저
독일에서 4차 산업혁명이 태동한 까닭은
글. 박승범 SCM칼럼리스트
필자는 여태껏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시스템에 의해 움직일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시간을 변화하는 데 할애해야 하고, 무엇보다 시스템과 규칙에 따라 일하는 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 대선 국면에서 후보들이 발표한 공약과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필자가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차 산업혁명은 시스템과 규칙이 아니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19대 대선, 후보들은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응하기 위한 저마다의 방안을 내놓았고, 유권자의 이목을 끌었다. 언론도 이 부분에 대한 공약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공약 자체에 대한 논평도 많이 나왔다. 후보 중 누구도 공약의 실행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는 게 중론이었다. 필자도 아쉬운 바가 있었다. 4차 산업혁명의 ‘선결 조건’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결조건일까? 4차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독일로 가보자. 4차 산업혁명의 개념이 태동하기 이전 독일은 저가품 시장에서 경쟁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고가품 시장에서도 피 터지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실제 독일의 진짜 경쟁력은 고가품 분야다.) 게다가 당시 독일은 인구학적으로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할 지경이었다. 합계 출산율은 1.43명으로 우리나라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고,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돼 EU 평균을 웃돌았다.
시장 경쟁력이 떨어지고 생산가능인구도 줄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이 북한처럼 고난의 행군, 천리마 운동, 속도전 운동, 천삽뜨기 운동, 국 안 먹기 운동, 별보기 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할 수 있었다면, 4차 산업혁명과 같은 개념은 막말로 개나 줘버렸을 것이다. 남녀노소 모두 화장실도 안 가고, 담배도 안 피우고, 밥도 조금씩 먹어 가며, 하나 일할 시간에 서너 개를 일해서, 투입한 생산요소와 비교할 때 훨씬 더 많은 성과를 낼 수만 있다면, 머리를 복잡하게 굴려 프로세스를 고민하고 새로운 시스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북한과 다르다. 노동자에게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일을 하라고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는 나라가 바로 독일이다. 독일이 사람과 기계의 조화, 노동조합과의 대화를 근간으로 한 고용 유지 혹은 전환, 기계에 의한 생산성 극대화, 제조업 경쟁력 강화 등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4차 산업혁명은 인간과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탄생했다.
우리나라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4차 산업혁명의 선결조건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다. 만약 연구개발부서가 영업부서의 무리한 사양변경 요구와 출시일정 압박에 시달리며 밥 먹듯이 야근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사람의 활용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이는 바람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못 버티는 사람은 그만둔다. 젊은 신입 연구원이 들어온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신입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러다 큰 사고를 낸다. 사고 이후 서류 작성 및 각종 내부심의 절차가 강화된다. 이제 밥 먹듯이 하던 야근을 숨 쉬듯이 한다. 비숙련자의 증가로 개발 품질이 떨어지면, 구매부서와 자재부서 담당자는 품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결국 한 부서에서 사람을 소홀히 여기는 행위는 나비효과가 되어 기업 전체를 힘들게 한다. 회사의 그 누구도 일에서 ‘비전’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사람의 힘이 무한하다고 믿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의 힘이 무한하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게 힘들어진다. 그러한 이들은 새 시스템이 들어와 익숙한 프로세스를 바꾸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시스템을 도입하기보다는 값싸게 사람을 부리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기업 내부에서뿐 아니라 기업 간에서도 이는 그대로 적용된다. 법령상으로 각각의 기업은 서로 공정하게 거래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온갖 속임수가 동원돼 공정하지 않은 거래가 아주 당당하게 행해진다. 자기 기업의 이익만을 우선시하고 다른 기업은 등한시하는 태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근원에는 자기 기업에 납품하는 업체의 종업원 개개인을 하찮게 보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대선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후보들의 공약보다 그들의 노동 공약을 더 유심히 지켜보았다. 강제로라도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어떻게든 노동조건을 좋게 만들려는 후보가 누구인지, 결국 누가 더 사람을 존중하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노동 공약은 얼핏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처럼 보이고, 기업이 한국을 떠나게 하는 요인인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가 확립돼야만 사람을 값싸게 부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프로세스의 혁신과 기계화·자동화·생력화 등 한 차원 높은 기술 활용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이것이야말로 선순환이다. 이 선순환 구조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새로운 기술 시장이 열리고, 사람들의 여가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새로운 소비시장이 열린다.
엘리야후 골드랫(Eliyahu Moshe Goldratt)은 그의 저서 <더 골>에서 제약을 인식한 뒤 그 제약을 중심으로 프로세스가 움직이도록 재편하면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한다. 즉 프로세스의 혁신은 제약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을 미적지근하게 대하는 까닭은 그러한 제약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그 제약을 인식하자. 그 제약이란 다름 아닌 “사람은 소중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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