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6 오후 5:14:21
2008년 1월 이천 하늘은 시커먼 연기에 휘감겼다. 코리아 2000 부지의 냉동창고에서 일어난 화재로 40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다쳤다. 냉동창고는 가루가 됐고, 인근 창고에서는 아직도 그때 그을린 냄새가 난다.
이 메가톤급 화재 이후 부산, 대전, 광주, 강원 등 전국 곳곳에서 물류창고 안전을 점검하고, 화재 예방을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진리였다.
경기도소방본부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올해 10월까지 발생한 물류창고 화재 발생 수는 무려 150건이다. 재작년 15건에서 2년 새 10배 이상 급증했다. 이천 냉동창고 화재 이후 1년이 채 안돼 2008년 12월 서이천 물류센터 화재로 6명 사망했고, 지난달 19일 W 물류센터 화재로 창고 2개 동이 전소했다.
“물류센터를 화재로부터 지키자” 라는 노력을 한 이후 메가톤급 화재만 두 건 더 터진 것이다. 두드러지는 이유도 없다. 여타 화재 사건과 마찬가지로 가장 큰 이유는 ‘안전 불감증’이다. 물류센터 화재 시 피해액보다 사망자 수가 먼저 거론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 십 년이 지나도 여전한 ‘안전 불감증’
1998년 10월 29일, 부산 범창콜드프라자에 화재가 발생했다. 27명이 숨지고 16명이 다쳤다. 창고를 신축하며 건물 내벽에 우레탄 폼 발포 작업 중 건물 안에 가득 차 있던 유증기에 불꽃이 튀면서 불이 번진 것이다.
인부들이 동시에 작업하는 공사현장에서 별다른 안전조치 없이 유증기를 일으키는 우레탄 발포작업과 용접 작업을 함께 벌였다. 이는 안전 불감증으로 발생한 인재(人災)였다.
냉동창고를 지을 땐 건물 특성상 단열을 위한 우레탄 발포작업이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다량의 유증기 발생이 불가피하다. 그만큼 화재 예방을 위해 더욱 세심한 안전조치를 마련하고, 작업 과정이나 인력 배치 등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십 년이 지나도 이와 같은 주의는 전문가의 입을 통해 반복될 뿐이었다.
물류업계는 2008년 1월 올 한 해 잘해보자고 각오하고 나서, 텔레비전에서 가슴이 발끝까지 내려앉는 뉴스를 접한다. 순식간에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건이다. 이 사건은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사건과 마찬가지로 우레탄폼 발포작업 중 발생했다.
10년 만에 닮은꼴 대형참사가 되풀이된 것은 공사현장에 만연된 안전 불감증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대형참사가 일어나면 그때뿐인 일회성 대책은 소용없다.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대책은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항상 ‘설마’의 유혹에 빠진다. ‘설마 우리 창고에 불이?’라는 생각. 그래서 화재 예방이 쉽지 않은 것이다.
당시 작업장에는 시너 유증기, 프레온 가스, 암모니아 가스, 우레탄 폼 등 인화물질로 가득 차 있었다. 용접 작업을 하는 곳곳에 화재를 부르는 물질이 있었다. 실제 경찰 조사를 통해서도, 작업장 안전수칙이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작업장 내 현장감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물류센터에 반드시 필요한 대피 계단 등 비상구도 제대로 설치 되지 않았다. 가로 180m, 세로 127m, 면적 2만 3천 338m²로 축구장 3개 크기의 대형 건물 반지하층에서 비상구는 1층으로 통하는 계단 한 곳, 외부로 이어지는 출입구 한 곳이 전부였다.
안전 불감증이란 말을 쓰기도 부끄러운 현장이다.
▣ 대형 화재로 번질 수밖에 없는 이유
그로부터 일 년이 채 안 된 2008년 12월 서이천 물류센터에서 같은 이유로 불이나 8명이 사망했다. 역시 일 년이 채 안돼 지난달 19일 이천 W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새벽녘 화재라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센터는 전소했다.
이번 W물류센터 화재 사건은 지난해와는 다른 면이 있다. 인명피해가 없고, 화재의 원인이 다르다는 것이다. 기존 화재 사건이 용접 작업 도중 튄 불티 때문에 삽시간에 번졌다면, 이번 화재 사건은 지게차운전자 휴게실에서 누전으로 발생한 것으로 해당 경찰과 소방서는 파악했다. 하지만 큰 불로 번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화재를 신고한 센터 경비원은 “소화기로 불을 끄려고 했지만 불이 창고 벽으로 옮겨 붙으면서 커졌다”고 전했다. 휴게실에서 누전으로 일어난 불, 바로 발견해 소화기로 끄려고까지 했는데도 끄지 못했다. 불이 창고 벽으로 옮겨 붙는 순간 소방서 물줄기가 필요한 불로 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류센터가 불에 약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작은 불티가 대형 화재로 번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샌드위치패널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매번 물류센터 화재를 키우는 원인으로 지목받았다. 양쪽에 철판을 부착하고 안에 스티로폼이나 우레탄폼을 넣은 샌드위치패널은 물류센터를 지을 때 가장 흔하게 쓰이는 재료다. 가격이 싸고, 단열효과가 뛰어나며 재빨리 지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하지만 센터를 지을 땐 효자인 샌드위치패널은 불이 붙으면 돌변한다.
일단 열이 가해지면 철판 사이의 인화물질에 불이 쉽게 옮겨 붇는다. 앞뒤 철판이 연통역할을 하면서 불길이 3배나 빠르게 번지고, 바깥 면 역시 철판이라 물을 뿌려도 소용이 없다. 이는 또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배출하며 순식간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7개 소방서에서 긴급 출동을 해도 진화에 어려움을 겪을 만큼 큰 불길로 번진다.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전문가들은 “불연재 사용 의무화 등에 대한 법제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물류센터에서 난 불이 대형 화재로 번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샌드위치패널이 빠지지 않았다. 창고 내에서 일하는 사람의 안전 불감증에 작은 불씨를 금세 횃불로 만들어 버리는 샌드위치패널이 만나 시너지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최악의 궁합이 아닐 수 없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지난해 1월 이천 냉동창고 화재 직후 부산, 대전, 광주, 강원 등 전국에서 물류창고 안전을 점검하고, 화재 예방을 위해 특별 소방점검에 나섰다.
노동부는 지난해 두 건의 사고를 계기로 올해 8월부터 냉동*냉장창고 시설 공사 시 사전에 ‘유해*위해 방지 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토록 했다.
이렇게 주의를 했는데 오히려 화재 발생 빈도만 더 높았다. 화재 예방을 위해 창고 내 시설을 점검*구비하고, 화재 시 신속한 대피를 위해 비상구를 많이 만드는 것, 또 정책적으로 창고와 같은 비상업용 건축물의 화재 방지 의무 규정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절대 예방할 수 없다는 방증이다.
사건 이후 신축한 물류센터는 화재 발생에 대비할 수 있게 지어지고 있지만, 이미 지어진 물류센터를 언제 불이 날지 모른다고 불연재로 다 뜯어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오래된 창고든 새 창고든 작은 불씨로 발생한 불에 사람이 죽고 창고가 사라지는 일을 예방할 수 있는 해답을 이미 알고 있다. 어려서부터 배우고 길에서도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한 마디만 명심하면 된다. 안전제일. 지키기만 하면 되는데···
물류센터 대형 화재 기록
1998년 10월 29일 = 부산 서구 매립지 내 냉장창고 범창콜드프라자 화재(27명 사망, 부상 16명)
2007년 11월 28일 = 경기 이천 C 공장 화재(소방관 2명 사망)
2008년 1월 7일 = 경기 이천시 호법면 냉동창고 화재(사망 40명, 10명 부상)
2008년 12월 5일 = 경기 이천시 마장면 물류창고 화재(6명 사망, 1명 실종)
2009년 11월19일 = 경기 이천시 대월면 물류창고 화재 (인명피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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