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에피소드로 본 한국 해운·물류 근대사 ⑤흥아해운

INNOVATION

by 김편 2012. 2. 13. 12:28

본문


[CLO] 물류는 흔히들 국가 경제와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혈맥이자 기업 번영과 경쟁력 제고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 이후, 황무지에서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수출입 물량의 운송을 책임진 해운·물류기업의 역할이 큰 힘이 됐기 때문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에피소드로 남겨진 해운·물류기업들의 활약상에서 대한민국 해운·물류 근대사를 재조명해본다. <editor>


외항 개척 반세기, 승풍파랑(乘風破浪) 흥아해운
자료: 흥아해운
정리: 이영종 기자

<<흥아해운은 1961년 12월 해운입국이란 사명을 갖고 세계 해운업계에 뛰어들었다. 50여년 동안 세계 해운업계의 숱한 부침 속에서도 많은 경영성과를 달성했다. 흥아해운은 부산과 삼척을 오가는 내항에만 눈을 머물지 않고 이내 세계로 눈을 돌려 한일항로를 개척했다. 이후 동남아 항로 등 여러 세계로 뻗어나갔다.>>

‘흥아해운의 시작’은 1951년 12월 8일 부산 자갈치 시장, 건어물 가게가 모여 있는 남포동 1가 35번지였다. 흥아해운은 설립 1년 만에 운항 선박이 30척으로 늘어났다.

1964년 운송계약을 체결했던 동양시멘트가 자체선박을 운영하며 위기를 맞았지만 고 윤종근 사장은 이를 기회로 삼고 과감하게 내항을 떠나 외항개척에 나섰다.

그의 첫 도전의 무대는 바로 일본이었다. 그해 5월, 3척의 흥아호(號)가 현해탄을 건넜다. 외항 개척 3년 만인 1966년에 운항 수입이 무려 다섯 배나 증가했다. 하지만 제5흥아호 건조자금에 대한 이견으로 주주들과 갈등을 겪으며 적자경영에 허덕였지만 1970년 들어 전사적 경비절감과 경영실적 개선에 힘입어 마침내 적자경영에서 벗어나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흥아해운은 창업 초창기 어려운 여건 속에도 경영위기를 극복했으며, 내항을 넘어 외항 개척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며 한국 해운업계가 흥아해운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흥아해운은 1970년대 한국 해운업과 함께 고도성장을 이뤘다. 일본을 중심 항로로 운항하며 제1흥아호부터 제11흥아호까지 철강선들이 한일항로를 부정기적으로 운항했다. 1972년에는 재팬라인(Japan Line)라인과 컨테이너 대리점 계약을 체결했다. 1975년 일본 니신해운의 한국대리점으로 TSR서비스를 실시했고, 1976년에는 케미컬 탱커 항로가 열렸다.

동남아 항로는 1974년부터 레인보우호가 부산~홍콩을 부정기적으로 운항하면서 본격화됐다. 아울러 싱가포르쉬핑 NOL과 유럽지역 컨테이너 계약 체결에 이어 뉴질랜드 해운회사와 한국대리점 계약을 체결하고 항공화물대리점 면허까지 취득하면서 바다와 육지 그리고 하늘까지 잇는 수송망을 갖추게 됐다.

흥아해운은 이러한 실적을 바탕으로 부산 중앙동 사거리 앞에 부지를 확보하고 1979년 3월에 신축사옥을 갖췄다. 당시 이 건물은 부산역 인근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흥아해운 성장의 상징이었다. 1977년 흥아해운은 매출이 105억원을 기록하며 첫 100억원대를 돌파했다. 매년 지속성장을 진행하며 1980년에는 260억원을 달성했다.

그 결과 경영실적에 대한 포상이 이어졌다. 1977년 제1회 해운의 날에 이어 2년 연속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교통부장관상, 동탑산업훈장, 국무총리상, 철탑산업훈장, 해운공로기장 등을 받았다. 하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이러한 호황은 1980년 들어 세계 해운업의 장기 침체국면을 맞이하며 국내 해운업계를 불황을 맞이했다. 결국 외항 해운업계는 1982년에 1024억원이라는 엄청난 결손을 내며 일부 선사가 도산하거나 선박이 해외에 억류되는 등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정부는 ‘해운산업합리화’라는 카드를 꺼내들었고 1983년 3월 합리화계획서 마감 결과 63개 선사가 17개 그룹으로 집약됐다.

이러한 과정 속에 흥아해운도 온전하지 못했다. 범한금속의 부도로 흥아해운이 연쇄부도로 내몰려 도산의 위기를 맞이했다. 흥아해운은 1984년 채권단 75%의 승인을 얻어 법정관리를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많은 어려운 과정이 있었지만 지금 회장인 이윤재 사장을 법정관리인으로 선정하며 흥아해운은 경영정상화를 추진해 모든 채무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며 다시 일어섰다.

서울로 본사를 옮기며 많은 변화를 시도했고, 1987년 경기호황으로 물동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며 운임상승을 효과를 누리며 매출 면에서 전년 대비 26% 향상된 665억원을 기록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흥아해운은 중국과 베트남 항로를 먼저 선점함으로써 도약의 기반을 다졌다. ISM/ISO 규격의 안전품질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 IMF 외환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했다.
이후 많은 발전을 거듭한 흥아해운은 2000년대에 들어 흥아해운은 먼저 초일류 종합물류기업을 비전으로 설정하고 경영운동을 지속했다. 그 결과 법정관리 졸업과 함께 최대 경영실적을 달성했으며, 이윤재 회장이 금탑훈장을 수상했다.

2000년 들어서도 흥아해운의 독보적 존재감은 계속 이어갔다. 한일항로에 36개 항을 개척해 경쟁력을 갖췄고, 중국 현지 법인을 설립하며 중국항로 개척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 구독문의 02 3282 3850 (이명순 대리)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