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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버지 삼일만….

INSIGHT

by 김편 2013. 10. 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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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동암 삼성전자 부장


아버지가 흙으로 돌아가신지 2년이 되었다. 장례식을 치뤘을 때는 아버지가 안계신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는데,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옹달샘 물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새록새록 솟아 나오고 있다.


2011년 4월19일 9시경,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울먹이면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했다. 아버지가 있는 포천 요양병원에 도착하려면 족히 2시간이 넘은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구리IC을 넘어가는데, 누나한데 다시 전화가 왔다. “동암아!, 아버지 방금 돌아가셨다.” 전화 건너편에 흐느끼는 누나 울음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아! 돌아가셨구나, 이제는 아버지가 더 이상 내 곁에 없구나.” 머릿속에 섬광처럼 번쩍이면서 내 가슴을 짓눌렀다. 오랫동안 병환에 시달렸지만 그때마다 잘 극복하시고, 살아계셔서 늘 감사했는데, 2주전에 병원에 아버지를 뵙을 때는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시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 몸을 씻기고, 수의를 입히고, 손발톱 깎아 드리고, 수의천으로 감싸서 입관을 하기 전까지는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영면하신 후, 아버지와 아들로서 함께한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보았다. 헌신적인 아버지, 자식만 생각하는 아버지, 항상 자식 생각에 노심초사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그런 아버지, 절대로 그런 분은 아니었다.


내가 3살 때 어머니와 이혼하고, 나는 어느 절에 맡겨졌는데,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은 그런 갓난아이를 외면한 비정한 아버지였다. 초등학교 졸업식에 우등생으로 상을 받았는데, 중학교 때 반대표로 졸업식에 상을 받았는데, 한 번도 졸업식에 와주지 않은 그런 무정한 아버지였다. 내가 공부를 하든, 비뚤어져서 비행청소년이 되든 상관안하고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아버지였다. 17살에 공부 할 돈이 없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통한의 눈물 흘리면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무능력한 아버지였다.


서울로 올라와서 지갑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느 날 중학교 다니는 이복동생이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아버지가 술만 먹고 항상 때리고, 등록금도 안주고,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를 다니기 어려워, 형! 형처럼 서울에서 돈 벌고 싶어.” 이 말을 듣는 순간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 동생마저 나처럼, 고생을 해야 하는 생각, 형으로서 동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자괴감이 물처럼 스며들어 폐부를 깊숙이 아프게 파고들었다.


공장 사장님에게 사정해서 야간에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검정고시 합격하고, 공장사장님의 배려로, 야간대학에 다니게 되었다. 주경야독! 밤에는 공부, 기거할 집도 없어서 독서실에 부족한 잠을 자고, 눈비비면서 공부하고 낮에는 지갑공장에서 일을 하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어느 날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조교에게 나에게 와서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동암 학생! 아버지라는 분이 오셔서 학자금 대출을 위해 재학증명서 발급 요구해서, 처리 해드렸어.” 나는 뜻밖의 말에 가슴이 멍하여 한동안 서 있기만 했다. 아버지는 이전에 나에게 대학 재학증명서를 발급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내가 계속 거절하자 본인이 직접 와서 서류를 챙긴 것이었다. 발급한 재학 증명서를 이용하여 농협해서 자식 대학 등록금을 빌미로 대출받아서 술 먹는 유흥비로 탕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 이후,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소아마비로 다리는 절뚝거리고 살지만, 인생은 절뚝거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서 살아가는 아들, 매순간 목숨 걸면서 최선을 다해 한순간, 한순간 살고 있는 아들의 형편을 전혀 몰라주는 부끄럼조차 없는 아버지. 기도교인으로서 아버지에 순종하고 공경해야하다는 성경말씀에 너무 괴로워, 기도원에서 그분에 맨몸을 보이며 실컷 울면서 하소연했던 모습들, 기도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아야지 고민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내 결혼식에조차, 아버지는 참석하지 못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지만, 실제로는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검찰 수배령이 내려져서 참석하지 못했다. 아들로서 생각해보면 자식의 결혼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처참했다.


결혼 후, 아버지는 생활비를 계속 요구해서, 매달 보내드렸다. 내가 매달 받은 급여에서 감당 할 수 있는 생활비를 보내주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약속한 금액을 보내주면 항상 계속 더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생활비 문제 때문에, 아내와 다투는 횟수가 빈번히 많아졌다. 추가 생활비를 요구하는 아버지에게 계속 거절하자, 아버지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왔다. 유서였다. 내용은 “ 자식이 주는 돈 필요 없으니 잘 먹고 잘살라.”는 애기였다. 두 번째 편지가 왔다. 이번에는 편지에다가, 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유언도 함께 보냈다. 내용은 비슷한 내용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보낸 내용이 진짜 유서나 유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깨달은 것은 그런 행동이 생활비를 더 받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아내는 집안 살림도 힘겹고 아버지로 인한 마음고생 때문에 낙엽처럼 삐쩍 말라져갔다.

이런 아버지가 지금은 없다. 금방이라도 전화가 와서, “약값이 필요하니 돈 보내 주라.”고 할 것 같은데, 아버지는 더 이상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수욕정풍부지(樹欲靜風不止) 자욕양이 친불대(子欲養而 親不待)”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바람이 가만 두지 않으며 자식은 부모를 공양하려하나 기다려주지 않는다. 돌아가신 지금 “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만약 아버지가 삼일친대(三日親待), 삼일만 시간이 허락된다면, 그 동안 아들로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첫째 날은 5시경에 일어나 아버지와 같이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싶다. 아버지 손을 붙잡고 그분에게 진심어린 회개 기도를 드리고 싶다. 머리로는 아버지 잘 봉양해야 하는 생각만 했을 뿐, 필요한 물질만 공급해주었을 뿐, 가슴으로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 나의 죄스러움을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새벽기도 후, 공중목욕탕에 같이 가서 아버지 등을 밀어드리고 싶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와 공중목욕탕에 간적이 없다. 쭈그러진 아버지 등을 문지르며, 간지럼을 태우며, 나이 들어감에 대하여, 인생은 아름다운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날 밤 집근처 공원에서 별빛 하늘을 보면서, 윤동주의 서시, “……. 별이 바람에 스친 운다.”를 낭송하고 하면서, 묻고 싶다. “아버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나요?”


둘째 날은, 누나 가족, 2명의 남동생 가족들 그리고 나의 가족, 전부 우리 집에 모여서 밥을 먹고 싶다. 지금까지 한 번도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 한 적이 없어서 늘 가슴에 화석 같은 멍울이 남아있다. 식사를 마친 후, 아버지 발을 씻기는 세족식(洗足式)을 누나부터 막내까지 차례로 하면서, 그 동안 아버지에게 자녀로서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던 말, 모질게 행동 했던 일들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싶다. 반대로 아버지가 누나부터 막내까지 차례로 발을 씻기는 화답의 세족식을 하고 요구하고 싶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상처 주었던 말들,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행동들에 대해서 자녀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화해의 시간을 갖고 싶다.


셋째 날은, 그 동안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사람들 다 모아서, 서로 용서하는 이벤트를 열고 싶다. 특히, 마음의 상처가 큰 두 명의 여인에게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을 하고 싶다. 동생을 낳고 폭력에 견디지 못해 가출해 버린 새엄마, 그리고 나를 낳아 준 엄마가 아닌가 싶다.


부부사이는 영(0)촌이라 헤어지면 “님 → 남” 된다고 하지만, 두 여인을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이까지 낳고 살았으면 평생 가슴에 응어리가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가슴속에 깊이 숨어있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괜한 일이라고 나무랄까?


아 ! 아버지 삼일만, 더 살아계시면 사랑과 화해의 용서시간을 갖고 싶어요.

동생이 마지막 입관할 때 아버지 얼굴을 쓰다듬어 안으면서 울부짖었다.

“아버지 저희들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도록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동생 울부짓는 말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가 나의 아버지의 소중한 유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광야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한의지를 갖게 해주었어요.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말고 혼자서 살아 갈 수 있는 강인한 생각과 어려움에도 늘 감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요. 그 원동력은 17살 때부터 혼자 알아서 살라고 했던 무덤덤한 말 한 마디이였지요.”


아버지는 이제 정말 내 곁에 없다. 내 마음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눈물이 나면서 아버지가 정말 보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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