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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내·차·중> 돼지가방에 싣고 온 원단 300야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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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 2012. 3. 1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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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내공이 차이나는 중국 물류이야기② 
21세기 보부상, 따이공(代工)의 세대 변천사


글. 이슬기 | A.C.E Express 전무

[CLO] #. 단동을 오가며 배를 타던 김사장이란 따이공(代工)이 있었다. 단동에는 그의 조선족 아내가 조그만 살림집이 달린 한국상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권연장과 중국비자 발급문제로 한달여 만에 집에 돌아온 김사장은 아내에게 버럭 화를 내고 욕설까지 하고 말았다. 이유인즉 가게에서 제일 비싼 상품인 포장용 삼계탕을 두 개나 먹어 치운걸 보고는 울컥했던 것이다. 김 사장은 밥값 이라도 아끼려고 인천에서 배를 탈 때면 늘 컵라면 2개를 사서 저녁과 아침을 때운다. 그날은 그나마 바빠서 컵라면도 못 사고 그냥 배를 탔다. 물론 배안에 컵라면이 없겠는가, 식당인들 없었겠냐 만은 그냥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꾹 참고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허기진 배를 안고 집으로 왔던 것이다.

그런데 가게는 석유난로를 얼마나 피웠는지 후끈후끈 더울 지경이고 아내는 팔자 좋게 삼계탕 두 봉지를 해 치운걸 알게 되자 김사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선 것이다. 한국서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까지 당한 뒤 배를 타고 따이공이 된 김사장은 악착같이 한푼 한푼 모아서 한국상품 가게를 차렸다. 제품이래야 신라면에 된장, 고추장 같은 포장식품이나 간단한 문구용품, 손톱깎이 같은 신변잡화 몇가지가 전부였지만 한국에서의 실패로 좌절했던 김사장은 조금씩 희망을 되찾게 됐다. 그러던 중 조선족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제2의 인생을 살아 보겠다는 각오로 먹는것, 입는것 등 십원 한푼 아껴가며 배를 탔다. 그날 그렇게 허기에 휘청 거리며 집에 온 김사장으로서는 아내의 행동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5분 뒤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달여 동안 한국에 가 있느라 아내가 임신한 것도 몰랐던 것이다. 국제전화비 아낀다고 대답도 말고 듣기만 하라며 속사포 같이 이야기하고는 수화기를 부리나케 내려놓은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혼자서 그 기쁨과 당황스러움을 감당했을 어린 아내를 생각하니 한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부부는 그날 저녁 삼계탕 2봉지를 뜯어 만찬을 즐겼다. 

돼지가방에 싣고 온 원단 300야드(?)
얼마전 따이공이란 영화를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많은 얼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인훼리 타는 멸치 아저씨, 위동훼리 부산욕쟁이 할배, 진천훼리 쌍둥이 엄마, 인천세관 족제비 과장, 대련 부두앞 용달차 대장 수지에 아줌마…. 지금도 대련 멸치 아저씨는 대인훼리 갑판 기둥에 부새 몇 마리 걸어 놓고 왔다 갔다 하는지, 부산 욕쟁이 할배는 살아는 계신지..

수도 헤아릴수 없이 많은 따이공과 그들의 사연을 영화는 어떻게 그려 낼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아마도 극중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다소 과장도 하겠지만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사실 영화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듯 싶다. 아마도 영화 개봉 하면 필자가 1번으로 달려가서 볼 것 같다.

따이공의 역사는 1990년 7월 위동항운유한공사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국간 증가하는 여객 및 화물 수요에 대응하고자 한·중간 카페리선사인 위동항운유한공사를 양국간 합작으로 설립했고, 그해 골든브릿지(Golden Bridge)호를 취항했다. 1990년 당시 훼리 탑승객은 9000명 수준이었으나 이듬해인 2000년에는 45만명 수준으로 급증했고, 2006년에는 130만명에 육박했다. 골든브릿지호는 따이공 역사의 시발점인 셈이다. 1992년8월 한중국교정상화는 양국 사이에 수십년간 드리워 있던 죽의 장막을 걷었고 따이공의 본격적인 활동을 제공하는 발판이 됐다.

따이공의 면면을 살펴보면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연을 안고 한국과 중국을 오가고 있다. 현재 한중간 훼리노선은 11개 항로로 총 13편의 훼리(ferry)선사가 매주 약 40편의 훼리를 운항 중이다.

초기에는 조선족 따이공이 많았다. 한국을 방문하는 조선족 동포들이 한약재, 농산물 등을 반입했고 당시 세관에서는 이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감안해 대부분 면세통관을 해줬다. 서울역이든 탑골공원이든 사람이 모인 곳이면 좌판을 펴고 우황청심원이나 각종 약재들을 팔던 동포들이 따이공들이다. 이후 이들 중 일부는 점차 전문적인 보따리상으로 발전하게 됐는데 이들이 따이공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족 따이공은 유난히 여자가 많다. 역시 한국 여인의 핏줄을 이어받아 위세가 대단하다. LPGA에서 한국낭자들이 동창회를 하고, 북한 장마당은 여인네들이 장악한지 오래인 것을 보면 우연의 연속은 아닐 것이다. 중국세관에서 수입검사에 적발돼 세금에 벌금까지 물게 될 상황이면 이 대단한 유전자의 따이공들은 아예 거품 물고 드러눕는다. 준엄하게 눈을 부라리던 세관원들도 난감한 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달래다, 얼러다, 소리를 지르다, 결국에는 특별사면을 택한다. 그러면 세금은 반으로 줄고, 벌금은 없던 일로 된다. 물론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중국세관이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한번 일을 낸 따이공은 세관원들 사이에 회자되고 소위 찍혀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조선족 여성 따이공들이 98년 이후 본격적으로 늘어난 IMF 따이공들과 결합하면서 동업자가 되고 가정을 이루는 일들이 많아 졌다는 사실이다.  …계속

이슬기|A.C.E 익스프레스 전무이사, 인하대학교 물류전문대학원 물류MBA, 물류학 박사과정 수료
필자는 현재 ㈜에이씨이익스프레스 경영본부장으로 재직중에 있으며 2009년 인하대학교에서 물류MBA학위를 취득한 이후 동 대학 박사과정에서 수학하고 있다. 지난 12년간 중국, 미국 등과의 항공특송업무는 물론 물류분야 신규비즈니스 모델 개발에 뛰어난 감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최근에는 박사과정에서의 심도 있는 물류보안관련 연구를 기반으로 ISO28000 물류보안경영시스템에 대한 컨설팅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의 오랜 주재원 생활과 현지에서 체득한 실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물류 관점에서 중국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저서를 집필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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